[독서에세이] 김정용 교수 사범대ㆍ독어교육과

연구실로 책을 옮기면서 대학 때 읽었던 문고판 서적들이 먼지 속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책을 뒤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즐거움에 빠지다가 낡은 책자에 시선이 집중된다. 카프카의 『변신』이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했다니! 대학 초년 실존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내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던가.

『변신』의 일독은 그 후 카프카의 다른 작품과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하이데거의 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변신』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의적이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 그 결과 친구들과 술 마시며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열정적으로 토론한 적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특히 독일문학의 즐거움이자 매력이 아니었던가.

『변신』을 번역본으로 읽고난 후 독일어 원서를 구해 읽어야겠다는 욕망을 갖게 됐다. 지금도 연구실에 꽂힌 그 책을 꺼내 보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명동 골목길을 뒤져,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독일어 원서 『변신』을 만난 기쁨은 마치 20세기 초 프라하에서 카프카를 직접 목격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어 원서를 제대로 읽지도 못했지만 만나는 친구들마다 이 책자를 보여주며 자랑하곤 했던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뒤로 한 후 작품의 메시지가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이 좋아졌다. 그래서 대학 고학년과 대학원 시절에는 희곡에 관심을 가져서 브레히트, 뒤렌마트, 소포클레스, 체홉, 몰리에르 등의 작품을 읽었다. 희곡은 우리의 삶에 가장 가까이 있고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 가장 좋았다. 희곡작품을 통해 사회의 모순과 해결책, 개인의 허위의식과 이중성을 접하기도 했다. 혼자서도 신촌의 연극무대를 가고 대학의 원어연극을 관람했던 시절이 아직도 선명하다.

30대의 독일유학 시절에도 내 관심은 여전히 희곡 작품에 있었다. 독일 보훔은 인구 40만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희곡 작품을 최초로 상연하는 등 연극무대로 꽤 유명하다. 읽었던 희곡 작품이 연극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보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갖게 한다. 국내에는 조금 생소한 작가인 호르바트의 작품 활동을 뒤쫓으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갔던 적이 있었다. 헝가리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어느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다가 호르바트의 희곡 『비엔나 숲속의 이야기』의 연극 포스터가 눈에 확 들어왔다. 헝가리를 대충 보고 와서 그 날 저녁 이 연극을 본 것은 유학시절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신춘문예에 희곡작품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응모하는 것이 아직도 내겐 설렘으로 다가온다.

책을 떠난 화려한 삶 보다 책과 함께 하는 삶을



인생 중반의 독서전기를 써 보았다. 이런 색다른 전기를 쓰다보니 독서도 개인의 시각이나 인생관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나와 비슷한 독서 전기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앞으로 이 독서전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책을 떠나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인생전기보다는 이 독서전기가 내 삶을 온전히 대표하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왠지 여전히 허전함이 남는다. 그건 10대 중[]후반의 독서전기에 빈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책을 많이 읽었겠지만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게 별로 없다. 고전과 명작의 무게에 짓눌려 나와 관계없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라는 명령 때문에 책읽기를 강요당한 것이지 내가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 빈 자리를 채워보려고, 그리고 다가오는 청소년 세대에게는 이런 빈자리가 남겨지지 않도록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책을 읽어 본다. 『끝없는 이야기』, 『모모』, 『호밀밭의 파수꾼』,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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