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환경과 함께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디자인, 그레이프랩

포도는 여러 송이가 어우러져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이런 포도의 모습에서 이름을 따온 벤처기업 ‘그레이프랩’은 각 계층이 분리된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가 아닌 모든 사회 주체가 동등하게 연결된 사회를 꿈꾼다. 지난 5일(화), 그레이프랩의 김민양 대표를 만났다. 이곳에서는 발달 장애인의 예술 활동 기회를 늘려주는 ‘더하기의 미학’과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는 ‘빼기의 미학’이 실현되고 있다.

재생지로 만든 그레이프랩의 종이 독서대는 접착제를 사용하는 대신 손수 접어서 제작된다.
재생지로 만든 그레이프랩의 종이 독서대는 접착제를 사용하는 대신 손수 접어서 제작된다.

 

디자이너에서 시스템 설계자가 되기까지

김민양 대표는 ‘그레이프 구조’을 통한 지속 가능한 회사 시스템을 목표한다. 그레이프 구조는 유학 시절 그가 제3세계 여성의 삶에 주목하면서 만든 사회 시스템이다. 당시 제3세계 여성은 수공예품을 제작하더라도 종교적 이유로 시장에 나와 물건을 팔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중간 상인을 대체하고 판매자가 앱을 통해 직접 물건을 파는 ‘그레이프 플랫폼’을 개발했다. 그레이프 플랫폼을 통해 사회 취약계층에게 적정한 수익을 배분해주면서 이들을 주류 경제에 편입하고자 한 것이다. 

김민양 대표가 처음부터 사회 시스템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이었던 ‘카카오’에서 초창기 멤버로 일하며 새로운 이모티콘 사업을 제안했다. 당시 그림체가 뛰어난 이모티콘이 시장에 많았지만 이들은 메신저에서 활발히 사용되지 못했다. 이에 그는 메신저에 적합한 이모티콘을 만들고자 웹툰 작가에게 이모티콘 사업을 제안했다. 그는 “웹툰 작가의 유머코드와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이모티콘에 반영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모티콘 시장에 웹툰 작가를 불러오면서 웹툰 작가의 생태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김민양 대표가 기업과 웹툰 작가에게 동등한 수익 배분 구조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전까지는 유명한 웹툰 작가도 충분한 수익을 보장받지 못했다”라며 “작가가 만화를 그리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광고를 그리거나 다른 소일거리를 병행하곤 했다”라고 새로운 수익 배분 방식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를 계기로 회사가 노동자를 착취해오던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약자가 주류 경제에 포함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에 관심이 생겼다”라고 부연했다.

 

디자인에 상생의 의미를 담아

재생 용지로 만든 종이 독서대는 그레이프랩의 대표적인 제품이다. 김민양 대표의 유학 시절, 샌드위치를 자주 먹는 영국에서는 샌드위치 박스가 길거리에 쉽게 버려지곤 했다. 문제의식을 느낀 그는 부피가 크고 재활용할 수 없는 샌드위치 박스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 박스를 납작하게 접어서 버릴 수 있는 종이 박스를 디자인했다. 이후 김 대표는 한국에 돌아와 종이접기를 하다가 종이가 거치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우연히 펜과 노트가 올려진 종이를 보고 종이가 물건의 하중을 견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라며 “이후 책이나 컴퓨터와 같은 일상용품을 종이 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종이 거치대를 실제로 제품화시키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하중을 견딜 수 있는 독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종이의 두께나 접는 각도도 중요했다. 그는 “종이가 두꺼워지면 접히지 않았고, 접히더라도 접히는 적정한 각도를 찾아야 했다”라고 설계 과정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종이 독서대를 비롯한 그레이프랩의 상품은 대부분 발달 장애인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유학 후 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2년 동안 복지관과 장애 예술 단체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발달 장애인과 함께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는 “그레이프랩의 디자인과 발달 장애인의 미적 감각이 만날 때 나타날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다”라며 “이는 현재 그레이프랩에서 6명의 발달 장애인과 함께 작업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그레이프랩은 ‘아트 워크숍’을 통해 발달 장애인과 함께 작업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트 워크숍은 작업실에 음악을 틀거나 발달 장애인에게 디자인 서적을 보여주는 등의 방식을 통해 이들이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는 “그레이프랩에서는 발달 장애인이 그린 작품을 쪼개서 패턴을 만들거나 이들의 작품을 가공하지 않는다”라며 “색감이나 형태를 바라보는 그들만의 색다른 시각을 제품에 그대로 반영하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이프랩에서 작업을 한 발달 장애인은 자기가 일한 몫에 대한 시급을 여러 방식으로 보장받는다. 이들은 멤버십과 고용의 두 가지 형태로 계약을 맺는다. 멤버십 계약을 맺은 이들은 자신이 그린 작품에 대한 수익의 절반을 배분받고, 고용된 이들은 월급을 받는다. 이 밖에도 이들은 아트 워크숍에 대한 대가도 지급받는다. 김민양 대표는 “세 가지 경우에 모두 다 해당하는 사람은 삼중으로 수익을 받을 수도 있다”라며 “대부분의 발달 장애인의 일자리는 고용 불안이 심하기 때문에 다중 수익 구조로 안정적 고용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발달 장애인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시작했지만 이들의 사회성이나 자기표현 욕구를 증진하는 효과도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느린 것의 가치

그레이프랩은 제품 제작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술과 자원만을 사용한다. 김민양 대표는 불필요한 디지털 기술이 사용되는 모습을 보며 기술을 배제한 제품을 디자인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기술을 빼고 나니 종이 한 장이 남았다”라며 “종이 한 장으로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 끝에 종이 독서대가 탄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특히 종이 독서대는 손으로 접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화학적 가공이 이뤄지거나 접착제가 들어가지 않는다. 나아가 이들은 단순히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품의 생애주기를 디자인하기도 한다. 제품을 제작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제품이 실제 사용되는 과정, 제품이 버려지는 과정까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그는 “독서대에 화학적 코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자의 인체에 무해할 뿐만 아니라 종이가 버려지더라도 쉽게 썩거나 재활용된다”라고 설명했다.

김민양 대표는 아날로그적 제품을 디자인한다. 과거 유행에 민감한 IT 기업에서 일했던 그는 스크린에서 가상의 작업을 하고 자신의 디자인을 손으로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는 그레이프랩을 설립한 이후 종이로 된 제품을 만들며 아날로그 디자인의 미학을 실감했다. 아날로그적 미학을 전하고자 김민양 대표는 올해 초에 ‘느린 종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느린 종이’ 전시회는 재생지의 생애주기를 보여주며 제품을 통해 친환경적인 종이의 쓰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플라스틱은 가공이 쉬워 상품을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다”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 과정이 느린 종이를 사용했을 때의 가치를 전하려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레이프랩은 종이 독서대를 비롯한 여러 제품으로 친환경 세상을 만들어간다. 김민양 대표는 “디자인은 즉각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변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라며 “변화에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지속 가능하다면 그 자체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앞으로도 그레이프랩은 ‘포도송이 구조’라는 철학하에 지속 가능한 세상을 디자인해갈 것이다.

 

사진: 원가영 기자 irenber@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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