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교육과 김형렬 교수
윤리교육과 김형렬 교수

누구나 한 번쯤은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감정이 ‘한’(恨)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한국인은 침략, 약탈, 전쟁, 저개발, 가난과 억압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를 감내해야 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에 대한 원망을 ‘한’이라는 정서로 내면화하게 됐다. 더불어 여기에는 항상 다음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한’은 다른 민족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원’(怨)의 정서와 달리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며, 한국인은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잔인한 복수가 아닌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평화 지향적인 민족이다. 

사실 피해자가 복수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원래 온순하고 비폭력적인 사람이어서일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그가 약자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복수를 할 수 없는 약자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감정 중의 하나가 바로 ‘한’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 화가 나고 복수심이 들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으니 무기력해지고 ‘한’이 쌓이는 것이다. 이에 한국인을 ‘한’과 평화의 민족으로 규정한 최초의 인물이 일본의 학자며, 특히 이런 견해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는 점에서 ‘한’을 한국인 특유의 정서와 문화적 특성으로 정형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해석해 본다면, 한국인이 ‘한’을 지배적인 정서로 갖게 된 것은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세와 기득권 세력의 억압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약자의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것일 뿐, 다른 국가나 민족들과 구분되는 한국인만의 특유한 슬픔의 정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돌파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성숙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자랑하며, 전 세계인들이 BTS의 음악과 한국의 드라마에 열광하는 2019년 현재에도 한국인에게 유사한 정서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바로 ‘울분’(embitterment)이다. 최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보건사회연구소·행복연구소 공동 주최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한국의 울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속적 울분’을 느끼는 사람 32.8%와 ‘심한 울분’을 느끼는 10.7%를 포함해 한국인의 43.5%가 만성적으로 울분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분을 느끼게 되는 구체적 사안으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아픔이나 성과 등을 무시당한 경험, 사회·정치적인 사안에서 공정의 기준에 어긋나는 일 등이 제시됐다. 울분 관련 연구를 주도해 온 독일의 정신의학자 린덴 박사는 울분을 명백히 부당하거나 불법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반격할 여지가 없고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단순한 분노보다 더 복합적인 감정으로 정의한다. 이와 같은 정의를 따른다면, 최근 공중보건, 사회학, 심리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울분은 오랫동안 한국인 특유의 슬픔의 정서로 여겨져 왔던 ‘한’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울분의 정서가 한국의 2030세대에게서 가장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2030세대는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정의 등의 보편적 가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의 시기에 성장하며 교육받았고, 이에 경제성장이나 통일, 혁명 등과 같은 국가나 민족 중심의 대의를 위해서라도 보편적 가치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따라서 오늘날의 2030세대는 성인이 돼 사회에 진입하며 차별과 특혜, 비리, 부정 등과 같은 상황들을 마주하게 될 때 자신들이 옳다고 믿어왔던 가치 체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경험한다. 더욱이 마주한 현실들이 자신들의 노력만으로는 쉽게 변화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임을 깨닫게 되면서 일종의 무력감과 패배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2030세대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감정, 즉, 울분이 가장 높게 나타나는 이유일 것이다.

‘한’이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서라는 식의 이야기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미국정신의학회는 ‘화병’(hwabyung)을 한국의 독특한 문화 증후군으로 규정한 바 있다. 화병은 만성적인 스트레스 상황이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서 분노 증후군(anger syndrome)의 한 종류에 해당하지만, 분노감을 분출하기보다 억누를 것을 강요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적인 배경이 질병이나 증상의 발현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문화 관련 증후군으로 분류됐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한’의 정서가 비폭력과 평화의 상징이자 미덕으로 여겨지던 사회에서 한국인들은 일종의 집단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던 셈이다. 화병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공식적인 정신질환 분류체계에서는 삭제된 상태다. 하지만 만성적으로 심한 울분을 느끼는 한국인들의 수가 상당하다는 현실은 아직 정신질환 분류체계에 진단명으로 정식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분노 증후군의 또 다른 한 종류인 ‘외상 후 울분 증후군’(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이 화병을 대신하는 한국인 특유의 문화 증후군이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2030세대에게서 울분의 정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 우려할 만하다. 한국인들의 울분을 건전하게 표출하고 다스릴 방안에 대한 논의와 함께, 근본적으로는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과 제도의 변화가 시급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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