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한용주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한용주

배가 부르다. 일주일 전 먹었던 ‘푸른 목장’의 오리고기가 완벽히 소화되지 않았다. 그 식당에서 고등학교 동기에게 청첩장을 받았다. 그는 12월 결혼한다고 했다. 동기 중 다섯 번째였다. 올 2월 신논현역에서 열린 결혼식이 처음이었으니 두 달에 한 명씩 결혼하는 추세다. 함께 철부지 시절을 보낸 친구들의 결혼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직장이나 대학원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다르게 고등학교 동기들은 나처럼 미성숙한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그들은 이 지구 위 다른 누군가로부터 ‘함께 해도 좋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청첩장을 받을 때나 어색한 정장을 걸치고 축의금을 고민할 때면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너는 잘 살고 있니?’

이런 질문은 유익하지 않다.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삶의 문제를 자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문할 때면 김숨의 소설 『너는 너로 살고 있니』(마음산책)가 생각난다. 소설의 화자인 마흔의 무명 배우 ‘나’는 공연 중 쓰러진 이후 생계를 위해 경주의 한 병원에 11년째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여성의 간병인으로 취직한다. 모든 게 낯선 그곳에서 일 년 동안의 간병인으로 지내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경희 씨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수신인이 불명확한 편지를 쓰며 시공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완전한 자신을 어루만진다. 글은 극적인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결핍과 부적응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뿐이다.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다.

수능을 앞두고 온라인에서는 한 기업의 수험생 응원 글이 화제였다. ‘순응이 곧 끝납니다’라고 시작한 짧은 글은 재치 있으며 진심 어린 응원이었다. 몇몇 네티즌은 비관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건 우리 중에 최약체라고.’ 실로 그렇다. 대학 입학은 길고 긴 순응의 첫 단계에 불과할 뿐이라 알려져 있다.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그 모든 게 수능보다도 힘겨운 일이라는 것이다. 

한 개체의 순응은 진화라 볼 수도 있는 종의 적응 과정과 다르다. 순응이란 개체 단위에서 외부 상황에 적합하게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순응의 예시로는 암순응과 명순응을 꼽을 수 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이동할 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점차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암순응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이동했을 때 역시 처음엔 눈이 부셔 아무것도 못 보다가 시간이 지나면 시각이 돌아오는 걸 느낄 수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암순응 메커니즘은 20세기에 걸쳐 천천히 밝혀졌다. 과학자들이 지식의 터널에서 암순응을 찾아내는 과정으로부터 우리는 순응이 얼마나 복잡다단한 과정인가를 알 수 있다. 암순응이 처음 관찰된 건 19세기 말이었으나 신경물리학과 전기생리학적 접근법을 사용한 다양한 연구와 치열한 논쟁이 20세기 내내 이어졌다. 2004년이 돼서야 두 학문적 접근법을 포괄하는 간상세포 중심의 메커니즘이 완성됐다. 그로부터 2년 후 과학자들은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암순응에 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가 하는 문제, 즉 ‘지연된 회복’에 대한 대안적 설명을 제시했다. 암순응은 여전히 실험실의 연구 대상이다. 예를 들어 자유 옵신의 세부 결정 구조가 어떠한가 하는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도 암순응의 지도를 그리는 중이다.

어둠 속에 두 눈이 순응하는 과정을 알아내는 일조차도 완결짓지 못한 우리가 무형의 인생에 제대로 순응하고자 하는 건 오만이다. 설령 암순응 메커니즘 전부를 이해하게 되더라도 이를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과학자의 고생 앞에서는 모든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욕심일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상책이다. 속의 더부룩함이 나아졌다. 이제는 내 내장의 모자람을 받아들이고 뭔가를 먹어야 할 것 같다. 순응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동기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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