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학과 채경수 강사
동양사학과 채경수 강사

순수하게 재미로 역사책을 뒤적이는 시간을 한껏 즐기고 나니 어느새 대학원생이라는 오묘한 신분이 돼 있었다. 직업인 듯, 또 직업이 아닌 듯. 즐거운 듯, 또 괴로운 듯.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점은 그 공부를 왜 하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내가 대답할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금방 대답이 옹색해졌다. 다들 오늘을 살고 오늘의 세상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는데, 나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양 옛날이야기에 파묻혀 살고 있다는 묘한 자괴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같은 고민을 머리 한구석에 박아 둔 채 사료를 읽었다. 한 범용한 군주의 이야기였다. 그는 어떤 측면에서도 탁월함을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길 가는 이를 붙잡고 물어보면 그를 아는 사람이 천 명에 한 명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계보 상 앞뒤에 있는 군주들이 줄줄이 걸출한 인물들로 채워진 덕분에 존재감이 완벽하게 지워진 불운까지 타고났다.

내가 읽은 사료에서 그는 큰 위기에 봉착한 자기 나라의 상황을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를 극복해내고야 말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가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걱정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평범했고, 결과도 그저 그랬다. 영웅적 군주였다면 분명 탁월한 면모를 보였을 대목이었다.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러한 초인적인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그를 둘러싼 신하들은 상황을 마구 호도해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결정을 얻어내려 했고, 그에게는 누가 더 옳은지 제대로 구분할 수단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의 나라는 결국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에 따라 운영됐고, 그 결정의 영향력 속에서 다음 국면을 맞이했다. 

어느새 그의 사연에 푹 빠져든 자신을 발견한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왜 나는 그의 고뇌를 내 것처럼 느꼈을까? 오랜 궁리 끝에 나와 그의 처지가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나뿐 아니라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민이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주권자지만 또한 너무나 평범하고 미약한 존재다. 우리 자신의 소박한 능력과 비교하면 세상이 쏟아내는 문제들은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해 해결은 고사하고 관심을 기울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과중한 중압감을 피하는 데는 모르쇠만 한 것이 없지만, 눈앞에서 잠시 사라졌던 문제는 돌고 돈 뒤에 한층 더 큰 눈덩이가 돼 우리를 덮치기 마련이다. 이 상태로 매일 살아가다 보면 사는 데 별 도움이 안 돼 보이는 주권이라는 짐 덩이를 휙 벗어 던져버리고 복잡한 문제가 없는 곳으로 훌훌 떠나고픈 마음이 절로 든다.

나는 그 범용한 군주의 삶에도 비슷한 고뇌가 똬리 치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러한 조건 속에서도 계속 걱정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서 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동과 비범함을 느꼈다. 일단 그를 발견하고 나니 유사한 처지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평범한 군주들에게도 새삼 눈이 갔다. 우리는 대개 몇몇 탁월한 군주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 긴 세월 동안 국가를 유지 시킨 공로는 몇몇 탁월한 군주들의 망령보다는 수많은 범용한 군주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결정에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요즘 내 고민의 해답을 과거의 평범한 군주들에게서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평범한 군주들 간에도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 차이는 스스로 주인이기를 포기했는지 여부다. 그들 모두는 영웅적 군주들처럼 탁월한 재능을 갖지 못했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오력’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주인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고민과 걱정을 이어가는 군주들의 정치와 나 몰라라 하며 주권을 내팽개쳐버린 군주들의 정치 사이에는 탁월한 군주와 평범한 군주 간의 차이 이상의 현격한 격차가 존재했다. 나는 나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오랜 고민의 잠정적인 해답을 여기서 찾았다.

정치혐오가 만연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냉소가 마치 지성의 미덕인 양 자랑거리가 되는 시대다. 평범한 주권자로서 내 몫의 고민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비범함을 발휘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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