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연구소 김효진 교수
일본연구소 김효진 교수

소수자 운동의 역사에서 당사자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당사자학’으로 발전한 이런 흐름은 동시에, 당사자성을 강조하는 순간 체험의 배타성이 강조되며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 상호 이해와 협력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 즉 본질주의적 경향을 띠기 쉽다는 점이 비판받아 왔다. 

이 이슈는 성소수자 운동에도 적용된다. 성소수자를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표상하고자 할 때, 특히 창작의 주체가 ‘당사자’인 성소수자가 아니라 주류인 이성애자(heterosexual)일 때 어떤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는가? 제도적, 사회문화적 차별로 인해 성소수자의 자기 표명이 구조적으로 제약받는 상황에서 비당사자인 이성애자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당사자성에 대한 강조가 본질주의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식했을 때, 당사자와 비당사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이상의 문제들을 고찰할 때, 일본에서 탄생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보이즈 러브’(BOYS LOVE, 이하 BL)는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여성 작가와 여성 독자가 주도적으로 창작하고 소비하는 대중 장르로서 BL은 성 표현을 포함한 남성 동성애 서사(만화, 소설 등)를 중심으로 한다. 헤테로 여성들이 대다수인 이들이 남성 동성애 서사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것은 성소수자인 게이의 현실을 무시하고 이들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의 여성 만화가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는 비당사자로서 소수자를 표상하는 방식에 대해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중년 게이 커플의 요리와 평범한 일상을 다루는 청년 만화이자 요리 만화인 이 작품은 지난해 지상파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돼 많은 인기를 끌기도 한 화제작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남자 주인공 두 사람의 삶과 고민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가족, 친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그 고유한 맥락을 잃지 않는 동시에, 일반 독자들이 공감하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과 장치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요시나가는 본인이 작가로서 출발한 BL 장르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해 호리호리하고 미청년 스타일로 주인공 캐릭터들을 조형하고 있다. 이것은 일견 현실의 게이와는 다른 주인공 조형을 통해 작가의 ‘비당사자성’을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게이 그 자체를 대변하려고 하는 대신, 주인공 커플을 일종의 렌즈로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게이들과는 다른 스타일로 그려지는 이들이 게이로서 겪는 일상 속의 차별을 비당사자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주인공 커플 주변에 다양한 게이의 유형을 배치해 실재하는 하위문화로서 게이들의 스타일이나 유행 등을 작품 내에 포섭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요시나가는 인터뷰에서 “실제 게이 커플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전혀 게이처럼 보이지 않는 커플도 있었고, 성소수자의 권리 등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만났다”라면서 “그 결과 최대공약수적인 게이를 그릴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남녀커플 중에도 정말 다양한 커플이 있는 것처럼 게이 커플도 다양하므로 맘대로 그리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인류학자 런싱(Lunsing)이 지적한바, 당사자 담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게이 내부의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고 했을 때 『어제 뭐 먹었어?』에서 요시나가가 섬세하게 그려내는 ‘게이 같지 않은’ 게이 캐릭터 또한 그런 다양성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조압력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가까운 이를 제외하고는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주인공의 스탠스는 실제 게이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것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주인공 커플은 게이 커플로서 일본 사회에 잠재돼 있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겪는 당사자인 동시에 헤테로 여성인 요시나가를 대리하는 비당사자로서의 측면도 지니고 있다. 주인공 커플 중 한 명은 변호사지만 여성적으로 간주되는 요리를 일상적으로 즐긴다. 다른 한 명은 소녀 같은 취향과 감수성을 지닌 미용사다. 이는 일반적으로 여성적으로 간주되는 특성들을 배분함으로써 사회적 성차로서 젠더를 유희화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소수자를 표상해서는 안 된다는 본질주의적 접근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진지한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자, BL의 역사에 바탕해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시도한 작품으로서 대중의 호응을 획득한 『어제 뭐 먹었어?』는 대중예술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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