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과 박사과정 송준규
인류학과 박사과정 송준규

여기,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를 고향으로 삼고 재건축된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하는 청년들, 바로 ‘아파트 키즈’다. ‘고향’이라는 애틋한 말에 ‘아파트’라는 딱딱한 단어가 연결된다니, 대체로 낯설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아파트의 모습을 기록하고 그곳의 사연을 수집해서 책을 내거나 사라질 나무를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등 재건축으로 ‘사라지는 고향’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의 재건축이 추진되던 때, 한 청년이 ‘고향이 사라지게 생겼다’라는 위기감에 그곳에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온 이들의 일상 속 이야기와 사진을 수집하면서 독립잡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 시작됐다. 그리고 공감은 확산됐다. 주민들도 반가운 반응을 보였지만, 다른 주공아파트에서 자라온 청년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페이스북 페이지 ‘안녕, 잠실주공5단지’, ‘개포동 그곳’이 개설됐고, 책 『고덕주공, 마지막 시간들』,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가 발간됐다. 태어나자마자 아파트와 함께 자라오면서 계속 정주했거나 아니면 그곳을 잊지 못해 다시 돌아온 청년들이었다. 

‘고향이 사라지게 생겼다’라는 위기감 속에서 아파트 키즈는 ‘추억할 권리’를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들이 재건축 조합이나 지자체에 목소리를 낼 자리는 없었고, 재건축을 반대하며 ‘정주할 권리’를 직접 내세우지는 못했다. ‘정주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어쩌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건축에 깔린 ‘사유재산권’의 의미와 함께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한 청년이 “어머니, 왜 그리 재건축 재건축하시는 거예요? 저는 여기에 계속 살고 싶단 말이에요”라고 여쭤봤더니, “얘, 너 결혼시키고 신혼집 마련해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라고 들었다는 대화. 그렇다면 이후에 그 청년이 자식 세대에게 신혼집을 마련해주려면 또 집값이 올라야 하는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은 이 딜레마는 아파트를 ‘사유재산권’으로만 인정하면서 생겨났다. 

‘정주하고 싶은 의지’와 ‘사유재산 증식의 재건축’ 간 충돌, 그 딜레마를 피해서 아파트 키즈는 ‘추억할 권리’를 집어 들었다. 어디에도 충돌하지 않으면서 내세울 수 있는 ‘틈’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공감의 확산’을 맞닥뜨리게 됐다. 아파트에 대한 추억은 청년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둔촌, 과천, 개포 등 곳곳의 여러 세대 주민들이 공감한다는 뜻과 ‘고맙다’라는 말을 전해왔다. 최근 강원 태백 화광아파트에서 치른 ‘아파트 장례식’ 사례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당시 광부들을 위해 설립한 아파트가 재건축으로 사라진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모여 아파트를 위한 애도를 표했다. ‘아파트를 추억할 권리’라는 건,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이자 지금까지의 삶의 모습이다.

아파트 키즈의 활동은 ‘추억할 권리’에서 시작했으나 이제 ‘기억의 실천’으로 확산되고 있다. 처음에는 사라질 고향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 담기’ 차원에서 시작했을지 모르나, ‘공감의 확산’으로 더 집합적인 행동이 되고 나아가 이제는 정책 실행에도 영향을 줬다. 서울시는 구상만 하고 있던 ‘아파트 한 동 남기기’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반포주공 108동, 개포주공 429동, 잠실주공 523동을 보전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둔촌 재건축 조합은 상징물인 ‘기린미끄럼틀’을 다시 복원하기로 하는 등 그곳의 ‘추억’이 재건축 단지에 반영되도록 계획을 수정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사유재산 침해’라는 반대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래도 우리의 도시 어디에선가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주 조금이나마 진전된 발걸음은 아닐까? 

여전히 ‘기억의 실천’은 시도 중이다. 최근 마지막 남은 22그루의 나무를 살리려는 개포주공1단지에서의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몇몇이 모여 ‘함께 자라온 나무’의 다가올 죽음을 애도하는 게 최선으로 남게 되겠지. 그러나 여전히 계속해서 곳곳의 ‘아파트 키즈’들은 마음속에서 싹틔운 ‘추억’에서 시작해 각자의 위치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기억의 실천’을 벌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