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형 부편집장
강지형 부편집장

지난 18일(월) 「한국일보」에 실린 홍콩이공대 오완리 학생대표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서 앞으로의 상황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굳이 말하자면 비관적이라고 본다”라고 답했다. CNN에서도 19일 보도에서 “시위대에 패배감이 조금씩 퍼져나가며 분위기가 무겁다”라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문득 내가 처음으로 5‧18이 무엇인지 알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함께 길거리를 가다 5‧18 당시 사진이 붙은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봤다. 부모님은 사진이 너무 잔인하다며 내 눈을 가렸지만,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게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부모님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거대한 악의 무리에 맞서는 정의로운 ‘우리 편’을 떠올렸고, “그래서 시민군이 이겨서 민주주의를 얻은 거죠?”라고 해맑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정의의 편이었던 시민군은 결국 궤멸되고 시위는 진압되는 것으로 5‧18이 끝났다는 것이다. 왜 착한 편이 못 이긴 걸까,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어린 내 몸을 뒤덮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무력 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홍콩의 또래 청년들에게 “정의는 승리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폭압에 항거한 당신들의 희생은 언젠가 결실을 맺을 것이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는 승리한다’와 같은 천도(天道)가 현실에 없다는 건 사마천 때부터 알려졌던 사실이다. 아마 이 글이 지면에 실릴 무렵에는 홍콩 시위는 완전히 ‘진압’됐을 것이다. 중국이 약속을 지켜 홍콩이 자치권을 얻을 수도 있지만, 엄청난 덩치의 중국을 현실에서 이기기엔 ‘정의의 힘’이 너무 미약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번 사건을 거치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질문을 바꿔보자. 결실을 맺지 못한 투쟁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실 투쟁은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우금치 전투에서 짚단을 방패 삼아 전진하던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총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신미양요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름 모를 군인들이 싸우다 죽어나갔지만, 결국 나라는 외세에 빼앗겼다. 이들은 그나마 역사책에 이름이 남은 사건이나, 역사책에 한 줄 남지도 못한 채 묻혀간 수많은 투쟁들도 있을 것이다.

사건의 가치를 결과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접근법을 취하면 수많은 사건들을 무의미하다고 판정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우리가 희구하는 가치는 유물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 『노인과 바다』에서 결국 노인이 빈손으로 돌아왔음에도, 독자들은 그의 ‘투쟁’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 어떤 행동의 동기와 과정에 공감할 수 있다면, 결과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나는 홍콩 시위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결국 홍콩 자치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홍콩의 투쟁은 언젠간 승리할 것이므로, 그 투쟁은 헛되지 않다”라는 말은 그릇될뿐더러, 투쟁의 의미를 전적으로 결과에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가치를 폄훼한다. 투쟁이 결실을 거둔다 해서 그 결실이 투쟁의 가치를 올려주는 것도 아니다. 투쟁의 가치는 성패가 아닌, 그들이 투쟁한다는 사실과 동기 자체가 주는 울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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