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탄생 200주년

해마다 여름이 되면 미국 동부의 해안 도시 뉴 베드포드에서 ‘모비-딕 마라톤’이 열린다. 멜빌 탄생 200주년이 된 올해도 어김없어서, 고래박물관이 주최하는 이 행사는 이제 23년이 됐다. 행사의 명칭이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와 전혀 다르게, 이 마라톤은 두 시간 가까이 달리는 순위 경기가 아니라 이틀에 걸쳐 장장 25시간 동안 멜빌의 고전 『모비-딕』을 여럿이 이어서 읽는 축제다. 미국인의 지극한 멜빌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851년에 출판된 『모비-딕』이 멜빌에게 작가적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자, 신생국 미국의 문학이 유럽에 버금가는 세계문학의 성취를 일궈냈음을 널리 알린 사건이기 때문이리라. 명성에 걸맞게 출판된 지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까지 이 작품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됐고 문자 이외의 다른 매체로도 수없이 구현됐다. 다행스럽게 최근에는 일본어 번역을 참조한 『백경(白鯨)』이 아니라 『모비-딕』을 제목으로 한 새 번역서들이 우리말로도 출판됐다.

『모비-딕』의 높은 인기와는 별개로, 실제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작품의 삼분의 일은 이른바 ‘고래학’을 다룬 백과사전 항목 같고 나머지 부분도 미친 선장 에이헙의 흰 고래 추격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 이스마엘의 철학적 명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나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을 기대한 독자라면 중도에 그만둘 확률도 높다. 작품의 난해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소설 장르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사뭇 다른 문체와 글쓰기가 담겨 있는 까닭일 테다. 그래서 미국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딴 포경선 피쿼드호가 냉혹한 미국 자본주의 문명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은 작품의 이 복합적 만듦새를 헤치고 나서야 가능하다.

『모비-딕』은 천재 작가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오랜 선원 생활 경험과 『모비-딕』보다 먼저 출판된 다섯 권의 해양 소설들이 이룬 성취가 바탕에 자리한다. 남태평양의 원주민 문화를 서구 문명인의 잣대로 바라본 ‘볼거리’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바다를 공유하는 인간 존재들의 ‘평등한 눈’으로 그려낸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모비-딕』의 세계가 지구의 북반구를 차지하고서 과학 기술을 앞세워 남반구의 토착 문명을 교화하고 지배하려는 제국의 식민화 논리와 크게 다른 이유기도 하다. 멜빌의 해양 소설은 제국과 식민지, 문명과 야만, 빛과 어둠을 나누는 지배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는 제 나름의 고유성을 갖는다는 문화 상대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제국과 자본은 뉴잉글랜드와 남태평양을 가리지 않고 전 지구적으로 관철되지만 결국 제국의 지배는 식민의 생명에 기생한다는 것, 식민의 어둠을 밝히려는 문명의 빛은 그들 스스로를 눈멀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백색은 가장 순수한 혈통이 아니라 더운 피가 돌지 않는 죽음과 파멸의 상징이라는 것. 『모비-딕』은 끝내 자기 파괴로 돌진하게 될 미국 문명의 미래를 예언한 레퀴엠이자 서사시다.

『모비-딕』의 문명 비판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재성찰하는 비판 작업으로 이어진다. 문명사회를 밝히기 위해 숨 쉬는 향유고래의 기름을 짜내는 19세기 포경 산업의 실용주의적 잔혹함이 멜빌의 사실적 필치로 가감 없이 고발된다. 고래를 다룬 동서고금의 지혜들은 포획을 위한 과학적이고 해부학적 지식들로 대체된다. 그리고 포경선 피쿼드호는 더 많은 포획을 향한 실용주의적 집단 광기와 흰 고래(=악의 화신)를 향한 에이헙의 분노에 찬 사적 원한이 결합된 전함으로 뒤바뀐다. 그 과정에서 이 ‘남자 형제들의 무리’는 잔인한 노동 착취, 끔찍한 인종 차별, 무분별한 환경 파괴, 그리고 파시즘적 권위주의와 공생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민낯을 극화한다. 이 난감한 19세기 포경선의 묘사에서 세계를 향해 무역 보복을 감행하고 ‘악의 축’을 되뇌는 미 제국의 현재 모습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모비-딕』이 고전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멜빌의 작가적 위대함은 『모비-딕』에서 현재 미국 제국의 씁쓸한 면모를 미리 읽어 낼 수 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멜빌은 18세기 말 독립 전쟁을 통해 전 지구적 변혁의 기운을 선도했고 이를 새로운 사회의 민주주의적 원리로 주조했던 신생국 미국의 가능성이 자신의 시대에 이르러 반동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음을 날카롭게 감지했다. 멜빌이 활동했던 19세기 중반의 미국 사회는 초창기 혁명 국가 미국의 새로움이 노예제 문제를 두고 내적 모순에 봉착한 격동기였다. 남북 전쟁은 이 모순이 착종된 해결로서, 제도적 차원에서 인종 차별을 철폐해 사회적 혁신의 계기를 마련한 동시에 해방된 노예들과 농본적 남부를 본격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 결과 사회적 혁신의 계기는 남부의 식민화를 통한 급속한 국가적 자본주의화와 서부로의 영토 확장으로 전이돼 제국주의적 팽창의 길로 나서게 된다. 멜빌을 비롯해 이 시기 미국 국민문학의 개화를 이끌었던 작가와 지식인들이 강렬한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남북 전쟁 직전의 이 시기, 즉 독립 전쟁을 이끌었던 사회적 혁신의 기운이 여전히 존재했던 19세기 중엽의 기간을 흔히 ‘미국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에머슨, 소로우, 호손, 멜빌, 휘트먼이 생산했던 미국 문학의 고전 작품들은 대부분 이때의 성취다. 특히 멜빌의 작품들은 당대의 뛰어난 작가들이 보여 준 사회적 혁신의 기운과 공명하되 그들보다 더 나아가 미국 민주주의에 내재된 어두운 암흑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그 암흑이란 미국의 민주적 원리가 품고 있는 일종의 획일주의의 그림자다. 이 문화적 획일성은 1830년대 미국을 여행했던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빌이 지적했던 미국 사회의 이른바 ‘은근한 전체주의’(soft totalitarianism)와 상통한다. 구세계의 위계질서와 권위를 타파한 미국의 민주주의 사상에는, 개인의 차이가 존중되는 평등의 원리보다 동일한 형식적 평등에 근거한 평균적 삶의 이념이 지배하는 집단주의를 앞세울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호손이 이 획일적 집단성의 역사적 기원을 미국 사회의 모태가 된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끔찍한 공동체에서 찾았다면, 멜빌은 당대 자본주의의 총아였던 포경 산업의 현장에서 효율을 앞세워 대중을 선동하는 에이헙이라는 광기 어린 지도자, 그리고 그를 용인하고 나아가 욕망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집단적 최면 상태를 고발한다. 따라서 흰 고래를 향한 무모한 추격전을 독려하는 원한의 화신 에이헙은 자본가의 수사로 물질적 보상을 암시한다. 그가 “내 위에 누가 있다는 거야?”라고 권위를 강변할 때 다인종으로 이뤄진 평등한 선원 집단이 열렬히 호응하는 장면은 극적 압권과 끔찍한 공포감을 동시에 전달해 준다. 에이헙의 모습에서 링컨과 히틀러가 겹쳐 보인다면, 그리고 열광하는 선원들에게서 혁명 대중과 나치 군중이 오버랩 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미국 민주주의와 백인 문명의 어둠에 대한 멜빌의 집요한 관심과 비판은 『모비-딕』이 출판된 이듬해에 나온 『피에르, 혹은 애매성』(1852)에서도 주제와 관점을 달리해 이어지며, 1856년에 펴낸 단편집 『피아자 이야기』에 실린 「필경사 바틀비」(1853)와 「베니토 체레노」(1855)에서도 계속된다. 『피에르, 혹은 애매성』은 당대의 감상 소설 형식을 극단적으로 변용해 가부장의 권위와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가정이라는 이상이 아버지의 어두운 과거와 피에르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모순된 욕망으로 파괴되는 비극을 그려낸다. 멜빌은 이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권위’와 ‘권력’이 개입되지 않는 평등한 관계의 추구가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 극화한다. 「베니토 체레노」는 노예 반란으로 위계질서가 뒤바뀐 난파선의 상황을 현실로 인지하지 못하는 백인 선장의 인종적 환상을 문제 삼음으로써 민주주의와 백인 문명의 선량함에 대한 미국인의 무의식적 믿음에 깃든 이데올로기적 허상과 맹목을 비판한다.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도 설파했듯이 미국 백인 지배 문화의 무의식에는 스스로의 본질적 선함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의 지도자(선조)들은 악행을 일삼는 폭군이 아니라는 맹목적 환상이 존재한다. 멜빌은 위 두 작품에서 이 두 근원적 환상이 깨지는 상황을 통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기대고 있는 자기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이런 환상은 지극히 평범한 백인, 특히 구세계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평등한 ‘형제애의 사회’를 이뤘다고 믿는 미국 백인 남성의 심리 현실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인종이나 성이 다른 이른바 가시적 타자, 혹은 자신이 기준으로 삼는 ‘평범성’을 벗어난 불가해한 존재에게 두려움과 혐오가 섞인 양가적 태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물론 이들은 스스로의 선량함을 확신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신봉하기에 이런 양가감정을 드러내 놓고 표출하지 못한다. 멜빌의 천재성은 이 표출되지 못한, 즉 표면적 선량함과 민주적 태도 이면에 존재하는 평범한 미국 백인 남성의 자기 망각을 문제 삼으며 이 ‘선량한 자기 망각’이 어떻게 무의식적 파괴 충동과 폭력성으로 분출될 수 있는지 그려낸다. 최근 현대 비평 이론에서 정치성을 논하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근거가 된 「필경사 바틀비」 역시 미국 민주주의의 도착성(倒錯性)을 문제 삼는 멜빌의 비판의 연장선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필경사 바틀비」는 두 가지 의미에서 현재성이 크다. 그리고 이 현재성은 올해 200주년을 맞은 멜빌의 탄생을 우리가 다시금 기뻐해야 할 까닭도 된다.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현재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주체의 저항 가능성을 사유하는 하나의 범례가 제시된다는 점이다. 들뢰즈, 아감벤, 네그리, 랑시에르 그리고 지젝에 이르기까지, 멜빌이 창조한 바틀비라는 형상은 특유의 글쓰기 거부행위—“내키지 않아요”(I would prefer not to)—를 통해 법과 벽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차별과 소외에 혁명적으로 저항하는 표상으로 자리 잡는다. 권력의 쟁취를 지향하는 직접적 대항이 아니라 억압적 시스템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저항의 태도를 통해 ‘무위’의 정치적 가능성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제도적 차원을 넘어 몸과 정신의 영역까지 옥죄는 생명 권력의 촘촘한 억압에 맞서 바틀비는 뺄셈의 방식으로 새롭고 창조적으로 저항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물론 이 바틀비적 저항의 방식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정치적 저항의 현실성과 관련해, 작품 「필경사 바틀비」가 정치성을 논하는 이론적이고 철학적 입장들이 전제하는 정치성의 개념 자체를 반성해 볼 수 있는 일종의 가늠자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바틀비라는 문학적 형상에 열광하는 이론가들의 관심과 달리, 멜빌의 작품 「필경사 바틀비」는 바틀비의 고용인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변호사가 바틀비를 대하는 태도의 ‘증상적’ 의미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 멜빌은 유령 같고 비현실적인 존재인 바틀비보다 이런 불가해한 타자를 대하는 미국 백인 남성—의미심장하게도 그는 독신이다—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관심은 멜빌이 그의 전 작품을 통해 지속해 온 미국 민주주의와 백인 남성의 환상 비판의 맥락과 일치한다. 멜빌은 바틀비의 혁명적 저항성보다 왜 미국의 평범하고 민주주의적 신념을 지닌 백인 남성이 불가해한 타자 앞에서 두려움과 동시에 공격성을 품고 이를 온정적 이타주의로 표상하며 그 타자를 병리적 존재로 만드는지에 더 초점을 둔다. 바틀비는 변호사를 저항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변호사는 미국 자본주의라는 억압적 시스템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니다. 멜빌은 바틀비라는 낯설고 표상 불가능한 타자를 대면해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상이 환상일 가능성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 전형적 미국 백인 남성의 자기 망각을 변호사에게서 읽어 낸다. 변호사가 마침내 바틀비를 정신 질환자이자 감상적 우울증에 빠진 병리적 존재로 표상함으로써 미국 백인 남성의 ‘자아’를 지켜내듯이, 그 환상은 자기 망각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잔인한 폭력성과 선량함의 외피를 두른 차별과 혐오의 논리로 탈바꿈한다. 멜빌은 이 환상의 역사적 계보를 그려냄으로써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에 앞서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웅변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다시 멜빌을 꼼꼼히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우성 교수영어영문학과
강우성 교수
영어영문학과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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