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 만난 사람들 | 김의성 배우

영화 〈부산행〉(2016)하면 떠오르는 배우는 누가 있을까? 작을 이끌어 나가던 주인공인 공유, 여느 작품에서처럼 호쾌한 액션신을 보여 주던 마동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부산행〉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는 작품 최악의 악역으로 분한 김의성(경영학과·90·졸)일 것이다. 몇 달 전에는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에 참여해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 김의성 배우를 그의 소속사에서 만났다.

 

≫〈부산행〉 이후 사람들에게 악역 이미지가 각인됐다.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배우 김의성
배우 김의성

그 이미지 덕분에 밥을 벌어먹는데 불만이 있겠나. 어떤 배우는 어떻게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를 작품 선택의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다. 뭔가 도전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연기할 자신도 있는 매력 있는 캐릭터라면 앞으로도 가리지 않고 하고 싶다. 배우는 능동적으로 자기 역할을 고른다기보다는 남이 하라고 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수동적인 성격이 강한 직업이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 중에 재밌는 역할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금 고착된 악역 캐릭터를 하게 될 때도 있고, 이를 역이용해서 재밌게 사용하는 감독도 만날 날이 있지 않을까. 악역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특별히 싫지도 않고, 내가 나서서 변신을 시도하고 싶지도 않다.

 

≫연기를 하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에는 연극반이 문화 운동의 주체로서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총연극회, 단과대학 연극반이 다 모여서 연극을 자주 하던 시절이다. 2학년 때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고, ‘어떤 방법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하던 중 연극반에 들어가게 됐다. 그때부터 취미로서 연극을 하다가 군대 마치고 복학하기 전에 선배들이 만든 극단(극단 ‘한강’)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게 됐다.

내 대학 시절, 80년대 중반에는 대학에 들어가면 다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렇지만도 않았지만, 1, 2학년 때 교문을 두고 경찰과 학생이 대치하는 시위가 계속 있어서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는 시위였는데 말로는 나도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도 용기가 나지 않고 육체적으로 허약해서 직접 몸으로 싸우는 일은 하기가 힘들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다가 연기를 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전까지는 대학에서도 순수한 연극을 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 사회가 험악해지고 대학생들도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면서 정치적인 연극이 많아졌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연기를 통해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연기를 하다 보니 내게 사람 앞에 서기 좋아하는 ‘끼’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업으로 삼게 됐다.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는 연기를 하지 않고 보냈다. 연기를 그만둘 때 다시는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연기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고, 이것저것 시도하고, 잘되던 때도 있었고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업 실패도 경험하고, 아버지도 아프면서 힘든 시기를 거쳤다. 이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고,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아버지가 6개월 투병 끝에 돌아가시기 전 유언을 남겼다.

“재밌게 살아라.”

무슨 말일지 고민하다가 연기를 다시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평소에 젊게 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진짜 젊게 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하면서 산다. 일하는 현장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거나, 두 번째로 많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나. 나이를 방패 삼아서 강자의 위치에 있으면 편하겠지만 반대로 외롭기도 할 것 같더라. 담배를 피울 때를 예로 들면 ‘아무도 나랑 담배를 피워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같은 두려움이라 해야 할까. 누구나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담배를 들고, 빌려달라고 하고 그 시간 동안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선배, 그런 아저씨, 삼촌,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사람이 살다 보면 착각을 하게 된다. 나도 그랬는데, 우스갯소리를 하면 주변 사람이 잘 웃어준다. 정말 재밌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강자의 우스갯소리에 웃어야 할 수밖에 없어서였던 것도 같다. 억지로 다른 사람과 친해지려 하는 것도 폭력적이다. 스스로 반성할 때도 있고 타인을 보면서 느낄 때도 있는데, 내가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억지로 타인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척하고 모두와 친하게 지낸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권위 의식을 가지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맺고, 같이 지내다 보면 진심을 알고 가까이 와주는 사람은 늘 있더라.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우리 아빠가 아저씨 같으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들과 젊게 관계 맺는 것은 아니고 아버지 세대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는 것이니 젊게 산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젊게 산다기보단 젊은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싶은 삶의 지향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점수를 매긴다면 75점 이상은 줄 수 있지 않을까. (웃음)

 

≫SNS도 많이 한다고 들었다

SNS는 정말 양날의 검이다. SNS를 한다는 것 자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냐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관심 받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관심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일기장에 쓰면 되지 뭐하러 남들 다 보는 곳에 게시물을 올리겠는가. 그게 사랑이건, 소위 ‘어그로’건 관심이 필요하니까 하는 행동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유용하게 썼다. 연기자로서 보여주는 면 외에 조금 더 나 자신과 가까운 나를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여지를 주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도 있고 어느 순간의 감상을 나누기에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SNS를 계속하다 보면 관성이 생긴다. 어떤 말을 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반응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하려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점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더라. 특히 트위터를 하면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 이건 정말 위험하구나.” 트위터에서 몇 년을 엄청 재밌게 놀았는데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고, 실수를 많이 하기도 했고 실수할 가능성이 너무 큰 것 같아 이제 트위터는 더 하지 않는다. 지금은 페이스북 페이지 정도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최근에 홍콩에 다녀온 일이 크게 이슈가 됐다

영화제 같은 걸 통해 홍콩에서 프로듀싱하는 사람들, 방송국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엄청 가까운 사이는 아니더라도 SNS에서 소식 전해 듣고 가끔 대화도 했는데, 어느 날 보니 시위하는 사진이 올라오더라. 지난 6월쯤인 것 같은데, 놀라운 광경도 많이 봤고 호기심이 생겨 그때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땐 200만 명씩 모이는 평화 시위가 진행되는 걸 봤는데, 올라오는 포스팅이 점점 바뀌더라. 격렬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SNS에 올라오기 시작하니 친구들이 걱정돼서 열심히 들여다보게 됐다. 그러면서 상황을 조금씩 알게 됐는데, 홍콩 시민들이 굉장히 국제적인 도시에 살면서도 섬처럼 고립돼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다 보니 중국의 반대편에서 시위를 지지해주는 국가나 다른 주체가 없더라. 나라도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 응원한다는 이야기를 조금 전하려다가 보니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졌다.

 

≫직접 홍콩에 다녀온 것인데 무섭지는 않았나?

가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홍콩에 다녀오고 보니 용기가 상당히 필요한 일이더라. 원래 나라는 사람이 좀 경솔하다. 행동할 때 심사숙고하지 않는 편이랄까. 원래 모든 일이 작은 계기로 얽혀도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커지기도 하지 않나. 홍콩 시위에도 처음에는 아주 가벼운 지지, 응원을 보내는 글만 올렸는데 그런 글에 소위 ‘악플’을 다는 사람을 보면서 화가 나 대응을 더 강하게 하게 됐고, 홍콩 시민들이 내 아무것도 아닌 행동에 너무 고마워하는 것을 보고 기왕 하는 거 더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에 홍콩까지 다녀오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홍콩에는 내가 MC를 맡고 있던 프로그램에 취재를 하자고 졸라서 가게 됐다. 가서도 깜짝 놀랐다.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환대를 받았고, 몇몇 사람들은 울기까지 해서 내가 생각보다 이 일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했던 일이 앞으로 나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고 언젠가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긴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경솔하게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밥 먹고 살 길이 아예 없어지면 후회할 것도 같은데 아직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된 거 아닐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있다면?

조금 충동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가능하면 사회적으로 견해차가 크게 나눠질 때 한쪽 편에 서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렇다 보니 신중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항상 하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가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고, 마음이 움직여 일을 저지르게 되더라. 쌍용차 고공농성 때 굴뚝에 올라갔던 사람과도 계기가 있어 술도 몇 번 마시고 좀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갑자기 굴뚝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듣자 정말 사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추운 겨울에 그 높은 곳에서 없는 희망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때도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 위에 있는 사람이 진짜 끔찍한 상황이니 외롭지라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도 너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널 보고 있다는 사인을 주기 위해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야말로 친구가 힘들어하니까 나도 조금 같이 힘들면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일이 점점 커진 것 같고, 홍콩 사태 때도 결국 비슷했던 것 같다. 친구에 조금 약한 것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길 말이 있다면?

없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주제넘은 이야기일 것 같다. 내가 가진 정보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끼리 덕담을 해준다고 생각을 하자면, 어차피 인생은 분열적이다. 사는 것이 다 조금, 혹은 많이 힘들지 않나. 지금 시대를 20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 같다. 힘들 때는 작은 행복을 찾거나 힘든 이유를 찾아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을 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둘 모두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개인적으로 행복하기 위한 노력을 끝까지 하는 것과 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손을 잡는 일 모두를 말이다. 이 두 개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작은 행복을 찾는 것을 포기하면 화만 나고, 다른 사람과 손잡지 않으면 점점 약해진다. 지금 20대는 힘이 약해 보인다. 다른 세대가 우습게 본다는 이야기다. 기분 나쁜 일이 아닌가. 왜 이렇게 우리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이렇게 떠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세대가 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다른 세대를 귀찮게 하거나, 무섭게 만들거나, 싸워야만 한다.

 

사진: 원가영 기자 irenber@snu.ac.kr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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