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솔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배진솔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요즈음 뉴스를 보거나 인터넷을 접하면 처음 접하는 단어들이 많다. 이들 가운데에는 유행어들도 있고 새로운 학문의 전문 용어들도 있다. 쏟아지는 단어들의 수를 헤아려 보자면 지금이 정보화 시대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을 모를 때면 왠지 모를 조바심이 든다. 큰 의미 없이 생겼다 없어지는 유행어라도 시류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들며 특히나 시대를 선도하는 분야의 용어들을 모를 때면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더 나아가 언어에 관해 흔히 이야기되는 속설 하나는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이른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언어결정론 가설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이라고 불리는 이 가설은 대개 이누이트인들의 언어에서 눈[雪]을 가리키는 단어들과 함께 인용이 된다. 이누이트어에는 눈을 가리키는 네 개의 별개의 단어 ‘aput’(땅에 쌓인 눈) ‘qana’(내리고 있는 눈) ‘piqsirpoq’(바람에 흩날리는 눈) ‘qimuqsuq’(바람에 흩날려 한 곳에 쌓인 눈)’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는 이누이트인들의 눈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언어에도 반영된 것이다. 언어결정론은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역으로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다. 언어가 단순히 도구라는 입장에서는 선뜻 납득이 되지 않지만, 도구로서의 미디어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와 같은 담론의 연장선으로 생각하자면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빨리 단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새로운 사고를 하기 어렵지 않을까, 다소 지나쳐 보이는 걱정이 들었다. 

언어결정론은 오늘날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고 있다.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역시 언어결정론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책들 중 하나다. ‘바다가 빨갛다니?’ 순간적으로 의아함을 자아내는 그 책은 그 의아함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인지 책의 표지까지도 아래 반쪽이 새빨갛게 칠해져 있어 인상 깊다. 저자는 19세기에 있었던 호메로스의 시에서 나타나는 색채 어휘에 대한 담론을 소개한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등에서 색채 어휘는 대개 ‘희다’와 ‘검다’로 나타나고, 그 밖의 색채 어휘가 나타나는 경우에도 ‘빨갛다’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한 글래드스턴은 호메로스가 색맹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색채 어휘가 한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호메로스의 색채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그리스어에서 색채 어휘가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오늘날에도 언어별로 색채 어휘가 덜 분화됐거나 다르게 분화된 예를 소개한다. 가령 미국인은 같은 ‘블루’로 간주하는 색을 러시아인은 ‘골루보이’(밝은 파랑)와 ‘시니이’(어두운 파랑)로 구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블루’라는 하나의 어휘를 사용하는 언어에서 ‘골루보이’와 ‘시니이’에 해당하는 두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은 보다 밝은 ‘블루’와 어두운 ‘블루’로 둘을 구별할 수 있다. 색채라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에 해당되는 어휘가 없어도 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또 하나의 예로 언어학적 개념 중 하나인 ‘factive verb’를 예로 든다. 이 단어는 ‘알다’ ‘발견하다’와 같이 오로지 사실인 목적어에 한해 결합하는 동사들의 범주를 지칭한다. 가령 “영희가 학교 간 것을 알았다”라는 문장에서 “영희가 학교 갔다”라는 명제는 반드시 사실이다. 저자는 언어학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factive verb’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지만 언어 화자들이 이 개념에 따라 언어를 사용함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단어를 모르지만 개념은 체득하고 있으며 알려주기만 한다면 단어를 금세 습득할 수 있다. 

요컨대 언어 내의 어떤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언어 사용자의 지각 능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색채 감각이나 언어 능력은 본능이라 여겨질 정도로 원초적인 것이어서 그럴 가능성도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단어를 습득하지 못한 상태라 해도 그 단어가 지칭하는 개념을 언제든지 습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소 과감하게 유추해 본다. 그런 희망을 갖고 있기에 오늘도 나는 새로운 개념들을 접하면서도 조바심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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