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한국학연구원 권기석 학예연구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권기석 학예연구사

서울대 관악캠퍼스 문화관 아래쪽에는 기와지붕으로 된 ‘규장각’이 있다. 규장각의 정식 명칭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조선 시대 규장각 자료를 보존하면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규장각은 캠퍼스를 오고 가는 많은 대학 구성원에게 늘 가까이 있지만 서울대의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특히 대부분의 학생은 규장각에 올 일이 별로 없을 듯하다. 이곳에는 강의실이 없을뿐더러 한국학 관련 전공자가 아닌 이상 학생들은 중앙도서관이나 여러 분관에서 웬만한 서적을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장각은 오히려 학외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다. 지하 1층 전시실은 2019년 11월 현재까지 방문자 수가 42,000명을 넘었다. 평일에는 이곳에서 초·중·고등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의 행렬을 마주칠 수 있고, 주말에는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다.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규장각은 캠퍼스 투어의 명소지만 정작 학생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관람객을 안내하는 중요한 임무는 봉사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해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규장각이 서울대 캠퍼스 투어의 명소가 됐지만 많은 규장각 방문자, 그러니까 전시실 관람객뿐만 아니라 열람실 이용자는 ‘서울대’가 아닌 ‘규장각’을 보러 온다는 사실이다. 규장각이 소장한 조선왕조실록, 의궤 등의 고문헌 자료는 세계기록유산과 국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그 자료군 자체는 규장각을 설립한 18세기 정조 시대 이후로 집결된 기록유산의 정수다. 이렇게 소중한 자료를 캠퍼스에 둘 수 있다는 것은 서울대 구성원으로서는 큰 행운인 동시에 막중한 책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초심은 무엇이었는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1월 1일 규장각 창립기념 특별전 “인간 정조, 군주 정조: 어정(御定)·명찬서(命撰書)로 본 정조의 삶과 이상”이 열렸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하고 양반 관료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학문과 정치를 모두 주도하는 군사(君師)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군이다. 그는 외척이나 환관의 정치 개입을 배제하고 학문적 식견과 함께 확고한 정치적 원칙을 지키는 ‘사대부’들과 정치를 이끌어 가고자 했다. 정조가 정치적 지도자인 동시에 학문적 스승이었듯이 규장각도 학술 기구인 동시에 정치적 의도를 내포한 기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정조가 겉보기처럼 정정당당한 정치만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공개돼 학계에 충격을 준 비밀 어찰에서 드러나듯, 그는 심환지 등을 사주해 온갖 정치 공작과 기만술을 시도한 바 있다. 아마 비밀편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신하가 올릴 상소문을 대필해 주는 국왕의 존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도 많은 최고 권력자들처럼 공개된 보고 체계에서 벗어난 일종의 비선을 두고 싶었던 정황이 역력하다. 지난 정부의 대통령 탄핵 사태가 부적절한 측근의 존재에서 그 발단이 비롯됐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는 나름 충격적일 수 있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자신을 보필할 수 있는 측근이 될 수 있는 조건으로 정조가 학문적 능력을 제시한 것은 그가 그야말로 ‘학자 군주’였기에 가능한 행보다. 특히 그가 초계문신제도와 같은 재교육 과정을 만들어 지도교수처럼 젊은 신하들을 학위과정생의 길로 몰아넣은 것은, 역대 어느 국왕도 범접하지 못할 독보적이면서도 고차원적인 통치술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수많은 시냇물에 비치는 달과 같은 존재라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자호하며 양반 관료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가르치는 군주가 되고자 했다. 국가를 학문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던 정조, 그의 유산을 품고 있는 서울대는 얼마나 그의 꿈에 다가서고 있는지 되물어 볼 때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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