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들어 관악을 보고 싶다”
“눈을 들어 관악을 보고 싶다”
  • 대학신문
  • 승인 2019.12.08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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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원로가 바라보는 서울대의 미래
염재호 제19대 고려대 총장(2015.03 ~ 2019.02)
염재호 제19대 고려대 총장(2015.03 ~ 2019.02)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지령 2000호 출간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서울대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성의 자리에 초대해 줘서 감사드립니다. 서울대와 『대학신문』이 불확실성이 가득한 장래에 밝은 빛을 비춰주기를 기원합니다.

서울대가 동숭동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을 관악산 기슭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출발하는 관악캠퍼스 준공식을 거행했던 것이 벌써 50년이 다 돼가는 1971년이었습니다. 당시 학생대표였던 국어국문학과 64학번 정희성 시인의 축시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명시였습니다. “그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첫 구절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대는 지난 50년간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역을 많이 배출해 냈습니다.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는 길목에 서울대 출신의 활약은 돋보였습니다. 경제계, 관계 등에서 서울대 졸업생은 대기업의 임원으로, 엘리트 관료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주역이 됐습니다. 민주화의 어두운 길목에서도 서울대 학생은 사회의 부조리와 독재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해 왔습니다. 정희성 시인이 울부짖었던 “온갖 불의와 사악과 어둠의 검은 손이 눈을 가릴 때에도 그 어두움의 정수리를 가르며 빛나던 예지여. 역사의 갈피마다 슬기롭던 아 우리의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의 자랑이었습니다. 

서울대는 학문적으로도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세계 대학 평가 기관인 QS의 평가에서 4,700여 개 세계 유수 대학 가운데 30위권의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는 서울대는 우리나라 대학의 연구 수준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선정하는 세계 상위 연구자 1%에도 올해 국내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여덟 명이 서울대에서 선정됐습니다. 

하지만 국립대학 법인화 이후 21세기 대학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서울대를 바라보는 것이 바른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민족의 위대한 상속자. 아 길이 빛날 서울대학교. 타오르는 빛의 성전 예 있으니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라는 시인의 말처럼 자신 있게 우리 사회를 향해 관악을 보라는 서울대 구성원도 많지 않을 듯합니다.

21세기 인류 문명사의 대전환이 시작되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바로 이 시기에 서울대 구성원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은 서울대의 미래에 대해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대학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서울대는 방향을 바로잡고 미래를 구상할까? 국립대이자 최고의 엘리트 대학인 서울대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까?

대학의 기능을 크게 교육, 연구, 사회봉사로 나눈다면 서울대의 미래도 이 세 가지 관점에서 고민하고 혁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교육은 획기적으로 개혁돼야 합니다. 지난 50년간 20세기 대량생산 체제의 산업화 과정에서 필요로 했던 대형 강의 위주의 전문화 교육은 21세기에 더는 적합하지 않을 듯합니다. 21세기는 정형화된 지식인 형식지(explicit knowledge)보다는 암묵지(tacit knowledge)가 더 필요하고, 전공자(specialist)보다는 전문가(professional)가 더 필요한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1960년대 교육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일방적 강의 교육, 출석부·중간고사·기말고사를 기준으로 하는 성적평가, 암기식 시험과 철저한 시험 감독, 상대평가, 15주로 구성된 학기제, 성적 장학금, 과도한 전공 필수·졸업 학점 등 20세기에는 유효했던 것이 지금도 전가의 보도처럼 아직도 유지돼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때입니다. 

다음으로 이제는 대학의 기능이 지식의 전수보다는 지식의 생산에 더 역점을 둬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교육은 전공 지식의 강의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고,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는 지식을 생산해 내는 기능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유수 대학의 연구 업적은 미국 유수 대학의 연구 업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상위 10%의 첨단 지식을 생산해 내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제 양적인 연구 업적보다는 지적 호기심을 갖고 평생을 걸고 연구하는 연구자가 많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서울대는 사회적 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대학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이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그 사회의 장래는 어두울 것입니다. 국립대일 뿐 아니라 대표적 엘리트 대학인 서울대의 구성원이 앞장서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미래의 길을 묻기 위해 관악을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입신양명만을 위해 노력하는 개인주의적 엘리트로만 이뤄진 서울대라고 하면 누구도 서울대의 편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의 아픔과 갈등을 치유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서울대인이 많이 배출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고 우리 사회에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전에 “길이 어두워지면 관악을 바라보고 싶다”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미래를 위해 고민하는 서울대가 되길 응원합니다.

 

염재호 제19대 고려대 총장(2015.03 ~ 20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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