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회 대학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가작
제61회 대학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가작
  • 대학신문
  • 승인 2019.12.08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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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

김민정(국어국문학과)

 

H의 팔뚝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나는 쭈그러든 H의 팔뚝에서 어떤 생명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살이 바짝 말라붙어 있는 철근이나 빈 수수깡 정도로 바뀔 뿐이었다. H의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고 눈은 움푹 들어갔다. 살짝 벌어진 입에는 호스가 연결되어 숨을 내쉴 때마다 쌔액 쌔액, 소리가 난다. 나는 그의 머리맡을 떠다니며, 만두피처럼 말라붙은 귀를 내려다보고 있다. 

H가 누워 있는 곳은 작은 병원 한 켠의 6인실 침대다. H는 한 달 전쯤, 호스피스 병동으로 침대를 옮겼다. H의 큰딸은 일인실로 옮길까요, 라는 직원의 물음에 ‘아버지가 적적하실 것 같아서’라는 이유를 들며 6인실을 고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당시 H는 적적하기는커녕 간단한 말을 하는 것도, 일어나 앉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렇게 옮겨온 이 방에서 침대 여섯 개가 모두 차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금 비어있는 H의 맞은편 침대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김씨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H 오른편의 서씨 할아버지는 바로 엊저녁에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6인실의 조용하면서도 소란한 분위기. 몸들이 내는 소리, 호스에 연결된 여러 입들이 내는 소리, 쌔액거리는 소리와 기침 소리, 가래 소리, 몸을 뒤척이는 소리, 몸에 연결된 기계가 내는 웅웅거리는 소리는 점차 사라져 갔다. H 홀로 남은 이 병실은 어쩐지 적막하기 짝이 없다. 나는 H의 몸에 연결된 온갖 줄들 사이로 들락거리기도 하고, 베갯잇에 내려앉기도 하며 이 고요한 밤을 버틴다.

바싹 마른 H에 연결된 온갖 줄들. H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각종 용액들이 그 줄을 타고 H의 혈관 속으로 흘러들고 있다. 나는 늙어 쭈그러든 인간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줄을 이전에도 여러 번 보았다. 다만 H를 붙들고 있는 줄들은 이전 인간들의 줄과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젊은 날의 H는 줄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거나, 건축 부자재를 옮기거나, 더운 여름 냉장고나 에어컨 수리를 하곤 했다. 그때의 H를 회상하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시절과 지금의 H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거리를 실감한다.

볼품없이 줄어든 H를 바라보며, H를 만나기 전까지 나를 거쳐 간 스물 세 명의 인간들을 차례로 떠올린다. 인간은 하나같이 연약해 투명하고 얇은 풍선 같다. 조그마한 뾰족함에도 쉽게 터져버리고, 늙어서는 바람이 빠져 쭈그러든다. 전직 운동선수였던 내 스물 세 번째 인간은 말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아무리 젊은 날 달리기 신기록을 세우고 멋진 근육을 만든다 해도, 노년의 인간에게 횡단보도 신호는 짧은 법이다. 한때 큰 키와 우람한 몸집을 가졌던 그는 시멘트 바닥에 머리가 반쯤 갈린 채 모로 누워 있었다. 운동선수 시절 그는 나를 신이라 불렀지만 나는 신이 아니기에, 그의 삶이 그런 방식으로 끝나 버릴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내가 맡은 스물 네 번째 인간인 H는 너무나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잠든 H의 늙은 얼굴을 바라본다. H의 눈은 감겨 있다. 깨어나면 그는 또다시 고통에 몸부림칠 것이다. H의 목구멍에도 줄이 삽입되고 나서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인간들의 말을 빌리자면 H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인간의 삶은 멀리서 보면 놀랍도록 비슷해, 누구든 일생을 살고 나면 그만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태어나고, 적당한 비율의 행복과 슬픔을 경험하다, 죽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같은 이유로 기뻐하거나 같은 이유로 슬퍼하지 않았다. 차마 셀 수 없을 만큼 짙은 감정의 결들은 풀어지고 뭉쳐지며 복잡한 무늬를 만들어 내었다. 겉으로 비슷해 보일지라도 속을 펼쳐보면 비슷한 삶을 살다 간 인간은 없었다. 나는 아직도 ‘평범’이라는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H는 나의 스물 세 번째 인간처럼 운동선수도 아니었고 어딘가에 특출난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세상의 주목을 받아보기는커녕 어디서나 자신의 자취를 지우는 투명한 인간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유독 H가 눈에 밟혔다. 그가 내가 맡은 마지막 인간이어서인지, 어릴 적부터 침잠하던 그의 성격 때문인지,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H는 조용한 소년이었다. 그는 종종 생각에 잠긴 채로 허공을 바라보곤 했고, 소년이었던 그의 눈동자와 나의 시선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몇 초 정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인간 스물 세 명의 평생들을 함께한 오랜 시간 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마주침이었다. 흑갈색으로 빛나는 오묘한 색깔의 눈동자. 그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했고 그 속에 나는 없었다. 그 사이 H는 시선을 옮기더니 다시 이면지를 놓고 글자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우연히 시계 부근에 떠 있었을 뿐이었구나, 생각하면서도 나는 왜인지 한참을 그 허공에 고집스레 머물러 있었다.

H가 태어난 곳은 흙길을 따라 쭉 나 있는 골목마다 낮은 지붕을 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는 흔한 농촌이었다. 비포장도로를 쭉 걸어 집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벗어나면 길 양옆으로 논이 아득히 펼쳐졌다. H는 그 논길을 따라 걸어 읍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국민학생 시절 H는 반에서 인기가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그렇다 할 친구 한 명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하는 편도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밑으로 낙서 같은 것을 끄적이다, 선생님에게 슬리퍼로 엉덩이를 맞는 학생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싶은 H의 어릴 적 모습은 그런 장면들이 아니다. H는 벽지가 엉성하게 발려 있는 판잣집 바닥에 엎드려 글을 쓰곤 했다. 아버지가 피고 버린 담뱃갑을 펼쳐 그 비좁은 공간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H의 아버지는 그가 글 비슷한 것을 끄적여 놓는 것을 너무나 싫어했다. H는 담뱃갑에 써 놓은 글이 발각되는 날엔 아버지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H의 아버지는 글을 잘 읽을 줄 몰랐기에 H가 쓰는 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H의 아버지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H의 문장이 좋지 않아서도 아니고, 쓰는 글의 내용이 불순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남자아이인 H가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무엇인가를 작은 글씨로 써 나간다는 것이었다.

— 계집애 같은 놈.

H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H는 아버지의 말을 그저 모두 듣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인지 혹은 그 무엇을 써내겠다는 마음인지,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계속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리고 장롱 밑에 평평하게 편 글자 뭉치 - 편 담뱃갑 - 들을 넣어두었다. 장롱 밑의 글 조각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은 없었다. 말년에 폐병에 걸린 아버지가 죽고, 후에 어머니도 세상을 뜬 다음 고향 집의 장롱을 수거 업체를 불러 내다버리기 전까지는.

장롱 밑에서 우수수 쏟아져나오는 담뱃갑 뭉치와 거기에 적힌 그 자신의 유년의 글을 보고서도 H는 별다른 동요를 하지 않았다. 그때 H는 이미 어린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고, 줄에 매달려 건물 유리창 닦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자신의 문장을 집어들던 H의 눈동자를 보고, H가 다시는 글을 쓸 일이 없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폭언에도, 외로운 학창시절에도 빛나던 H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이미 흐려져 무언가를 보고 있어도 허공을 보는 듯 공허해져 있었다.

*

나는 그 당시 H의 세계를 만드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난 스물 세 명의 인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맡은 마지막 인간에게도 그에 맞는 세계를 만들어 주어야 했다. 맡은 인간을 위해 작은 세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 나와 같은 ‘설계자’가 해야 할 일이다. H는 죽은 뒤에 내가 만든 그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었다. 

내가 맡은 첫 번째 인간의 출생과 동시에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인간의 죽음과 동시에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정확히 몇 년을 살았고, 몇 살이 되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인간의 시간대와 설계자의 시간대는 너무나 달라, 그들의 한 평생은 나에게는 일 년 남짓한 시간일 뿐이다. 나는 설계자의 시간대로 이십 사 년을 살다 죽게 된다. 인간들의 셈법에 따르면 스물 네 살의 나이에 요절하는 것이다. 

나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내가 맡은 세 번째 인간은 나를 ‘하늘’이라고 불렀고 다섯 번째 인간은 ‘절대자’라고 칭했으며 열일곱번째 인간과 스물 세 번째 인간은 나를 ‘신’이라고 일컫고 스무 번째 인간은 ‘조상님’으로, H는 언젠가 나를 ‘여보’라고 불렀지만 그 이름들 중 아무것도 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전지전능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임무를 띤 노동자에 가깝다. ‘설계자’라는 말은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이었던 나의 네 번째 인간에게 배웠다. 나는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설계자, 혹은 장인. 하지만 정확한 이름도 형체도 없는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 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 또한 나는 잘 알고 있다. 

H의 세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모으기 위해 자주 그의 꿈에 들락거렸다. 인간의 삶을 관찰하는 것 보다, 꿈 속에 들어가는 것이 자재들을 모으는 데에 효율적이다. 냇가에 강물이 아닌 두유가 흘러넘치는 꿈을 보고서 나는 H가 두유를 좋아하는 것을 확신했다. 가끔 고향집에 있던 큰 장롱이나 에어컨 같은 것이 그를 덮치기도 했는데, 그런 장면을 보고서는 H를 위한 세계에 네모나고 무거운 것은 모두 빼 버렸다. 고향 집에 불이 나는 꿈을 꾸었을 때 H는 미친 듯이 장롱 밑을 뒤져 모든 담뱃갑을 찾아내고선 바지 주머니에 글들을 넣고 논길을 따라 달렸다. 나는 그 꿈의 조각을 보며, 거대한 도서관을 짓기로 결심했다. 이런 식으로 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매우 정교해야만 한다. 

*

H는 반평생이 넘는 시간 동안 줄에 매달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줄에 매달려 건물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수십 미터 허공에 밧줄과 삐걱거리는 판자 의자에 의지한 채 유리를 닦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젊은 날의 H는 꽤 일을 잘 하는 편이었다. 그는 손이 재발랐고 일을 빠르게 끝낼 수 있어 남들보다 두 배의 일을 했다. H의 본업은 미장이였지만, 일이 없을 때는 유리를 닦았다. 

— 아버지는 줄에 매달려 있어.

H의 어린 작은딸은 입을 삐죽 내밀며 이야기했다. 큰딸이 문제집을 풀며 대꾸했다.

— 줄이 어때서.

— 대롱대롱 매달려 있잖아. 다른 아빠들은 안 매달려 있어.

— 그렇긴 하지만…….

중학생이었던 큰딸은 몽당연필을 빙빙 돌리다 말을 맺었다.

— 아빠는 가끔 통닭을 사 오잖아.

— 그래도 쪽팔려.

H의 작은딸은 H의 직업이 무엇인지 막연하게나마 떠올려 볼 수 있는 나이가 된 이후로부터 H가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금까지도, H의 직업을 부끄러워했다. 상견례를 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H를 부끄러워했다. 큰딸은 작은딸보다는 H에게 호의적인 편이었지만 큰딸 역시 아버지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불쌍한 존재를 외면하지 못하는 약한 심성 때문이었다. 

H의 부인 이명자는 출판회사에 다녔다. 이명자는 그 당시 아이를 낳고서도 일이 끊기지 않은 몇 안 되는 여성이었다. H가 이명자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이명자도 H를 깊이 사랑했다는 것을 나는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진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겁다. 나의 시간으로는 겨우 일 년 남짓한 시간을 살다 가는 그들이 마치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명자가 죽었을 때도 H는 줄에 매달려 있었다. 출판사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이었다. 나는 방 안에 갇힌 이명자가 복도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가, 뜨거운 열기에 놀라 손을 떼는 것까지 보고 건물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니, 도망친 것이 맞다. 무력한 설계자인 나는 그저 관찰할 수 있을 뿐 그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칠 수 없었다. 문고리가 뜨겁다면 문을 열어서는 안 되었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복도에 펼쳐진 화마가 방 안을 집어삼킬 것이었다. 첫 번째 인간 이후로 수백 번은 넘게 반복된 크고 작은 화재는 내게 이명자의 죽음을 선명히 상상하게 만들었다.

나는 건물 외벽을 통과해 길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수구 아래로 처박히고만 싶은 마음이었다. 가을의 쌀쌀한 길바닥에 허물어져내린 나는 이명자의 설계자가 이미 핵심적인 설계를 끝냈기를, 이 예측할 수 없는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 일 분이라도 빨리 이명자의 세계를 온전히 완성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이명자를 위해 기도하는 방식이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날들. H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그의 자그마한 가정을 생각한다. 이명자가 빠진 가정은 더욱 자그마해졌다. 실은 그보다 더 작았다. H가 생각하는 자신의 가정에 H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사라진 H의 가정은 곧 두 딸이었다. 퇴근길에 사 오는 통닭이나 꽝꽝 언 아이스크림 같은 것으로 H는 두 딸을 사랑했다. 불쌍하지만 마땅히 동정해야 할 벌레를 바라보듯 H를 바라보는 큰딸의 눈동자와 H를 부끄러워하는 작은딸의 눈동자를 외면했다. 딸들은 술에 취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H가 부엌 식탁에서 이명자를 떠올리며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으면 두 딸은 방으로 가 문을 잠갔다. 

서늘한 부엌에서 H는 울었다. 잠든 딸들이 깰까봐 소리없이 우는 울음이었다. 괴로워할 날이 너무나 많이 남은 그가 안쓰러웠다. 결국 나는 수소문을 해 이명자를 담당했던 설계자를 찾아냈다. 이명자의 설계자가 말문을 열었다.

— 이명자는 제가 맡은 4번째 인간이에요.

이명자의 설계자는 신참 설계자였다.

— 이명자는 내가 맡은 24번째 인간의 부인이야.

우리는 서로가 맡은 인간들로 자기소개를 끝낸 후 이명자가 얼마나 훌륭한 인간이었느냐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명자의 세계 이야기를 꺼냈다. 나의 말에 이명자의 설계자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예측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최선을 다해 만들었어요. 이주 기준을 통과해서 이명자는 거기서 살고 있고요.

그리고 이명자의 설계자는 미소지었다.

—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지 않든 나는 침착한 상대의 말에 어딘지 안심이 되기도 했다. 커피숍을 나오며 이명자의 설계자에게 나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H의 꿈에 이명자가 나오는 한 풍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명자의 설계자는 정확히 어떤 꿈을 원하시느냐고 물었다. ‘그래야 제가 꿈을 만드는 친구들에게 정확히 의뢰를 하죠’, 덧붙이면서. 

— 둘이 자주 데이트했던 경양식 집 기억나지.

— 그럼요. 사거리에 있는 경양식 집.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명자가 돈까스를 좋아했잖아요.

— 뭔가를 나이프로 썰어 보는 게 처음이라면서 웃던 맨 안 쪽 테이블 말이야.

— 시간대는 이명자의 회사가 끝난 후, 오후 일곱 시 정도. 둘이 좋아했던 가수 그룹의 통기타 베이스 노래가 나오고요. 마감을 알리는 노래가 나올 때 까지도 항상 같이 있었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 다음에 또 만나요. 맞지?

우리는 뒷 가사를 흥얼거리다, 마치 서로가 그 경양식 집에서 오랫동안 만나온 듯 긴 이야기를 했고, 내가 말을 맺었다.

— 좋아. 그럼 꿈속 그 경양식 집에서 둘이 다시 만나는 것으로 해 줘. 

봄이라기엔 여전히 쌀쌀한 사월 중순이었다. 나는 소주를 연신 들이키고 있던 H의 맞은편 의자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 여보.

H가 이야기했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고 그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몇십 년 전처럼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H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과, 그가 정말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결국 스윽 옆자리로 옮겨 앉았지만 H는 여전히 내가 앉아있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혹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상태로 H는 울고 있었다.

— 당신이 내 꿈에 일부러 왔다 간 것 나는 알고 있어. 

H는 소주를 한 잔 더 들이켰다. 그의 눈은 이미 토끼처럼 붉어져 있었다.

— 당신, 지금 여기에도 있어?

나는 슬그머니 다시 그의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 그 경양식집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에도 놀라 얼굴을 붉혔었잖아. 그런데… 얼마나 뜨거웠을까. 얼마나 뜨거웠을까 여보. 

뒤로 갈수록 그 말은 문장이 아닌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변해갔다. 여보, 여보……. H는 허공에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별안간 허공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단단히 취했다고 생각하면서도, H의 손바닥으로 다가가 가만히 그 옆에 동동 떠 있었다. 이명자가 H의 손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비춰 생각할 때 그의 손은 분명 따스했을 것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이 가지는 따스함이란 것이 무엇인지 나는 항상 궁금했었다. 죽으면 사라지는 그 기분 좋은 따스함이라는 것이.

가까이서 본 그의 손가락은 지문이 조금씩 닳아 있었다. 손바닥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혀 있고 굳은살이 울퉁불퉁했다. 굳은살 박힌 손이라도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듯하지 않을까. 그는 나를 담은 허공을 연신 ‘여보’를 부르며 쓰다듬었다. 그렇게 내가 맡은 마지막 인간이 붙여준 내 이름은 ‘여보’가 되었다. 그 이름은 나쁘지 않았다. 따듯한 이름이었다.

유리창 닦는 일과 에어컨 수리를 그만두고 공사판에서 일을 할 때쯤 그는 사뭇 늙어 있었고, 귀에 이명이 왔다. 폭염이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공사장의 크고 반복되는 소음은 그의 귀를 서서히 무너지게 했다. 귓속에서 계속 울리는 소리에 그는 공사장 동료에게 귀에서 ‘삐-’ 소리가 들린다고 이야기했다.

— 언제부터?

— 한 달 전쯤부터.

— 이명이네. 쯧쯧

안타깝다는 듯 끌끌 혀를 차는 소리에도 날카로운 ‘삐-’ 가 배경음으로 깔려 있었다. 그는 산업재해를 신청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사장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소음과 이명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H는 더이상 어떻게 인과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다 그런거지. 다리나 팔뚝이나 빙시되야 산업재해지 다른 건 재해도 아니여 그냥.

대구에서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는 다른 한 동료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 눈에 안 뵈면 고마 빙시도 아닌 거여.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는 그 소리는 H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남들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를 증명하는 것 또한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어둑한 밤 침대에 누우면 그 소리는 더욱 커지곤 했다. 두개골이 윙윙 울리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H만이 들을 수 있는, 그 안에서 울려나와 그를 찌르는 소리였다. 

— 귀에서 자꾸 소리가 들린다.

계속되는 폭우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쉬었던 날, 고등학교 삼학년인 작은딸과 서먹한 아침밥을 먹으며 그는 이야기했다. 작은딸은 국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 툭, 물었다.

— 어떤 소리요.

— ‘삐-’거리는 소리.

— 계속 ‘삐-’해요?

— 계속. 잘 때는 더 커진다.

— …….

— 이명이라는데, 이 소리 때문에 잠도 잘 못 자고…

— 아빠도 그럼 음악 들으면서 자 보세요.

— 음악을 들어도 들리는데.

— 아, 정말. ‘삐-’가 안 들릴 정도로 충분히 크게 들어야지요.

작은딸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수저와 다 비운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딸이 가방을 메고 현관에서 나갈 때도 ‘삐-’는 들리고 있었다. 일이 없는 날 집에서 아침을 먹는 것도 H에게는 불편한 시간이었다. 몸이 후끈거려 인력시장에도 나갈 수 없었다. H는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큰딸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큰딸은 짐짓 걱정스러운 말투로 병원을 권유할 것이었다. 창밖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천둥마저 울렸다. H는 거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H의 큰딸은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생 때부터 많은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그 상금이 H가 한 달 내내 일을 해서 받는 월급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 큰딸은 집에 있는 이면지 같은 것에 문장을 끄적였다. 그 모습을 보고 H는 퇴근길에 연습장을 사 들고 왔다. H의 큰딸은 조용한 편이었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상금을 받으면 헌책방에 가 책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면지에도, 공책에도, 헌책에도 글을 끄적였다. 그런 큰딸의 감수성은 예리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큰딸은 H를 불쌍히 여겼다. 책에서 흔히 나오는 무지몽매한 일꾼이 자신의 아버지라 생각했기에. 언젠가 성인이 된 큰딸과 함께 밥을 먹을 때 큰딸이 이야기했다.

— 내가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데 팔로워가 지금 삼만 명이 넘었어.

— 인… 그건 뭐고 팔로워가 뭐냐.

— 그냥 음… 사진 올리는 사이트 같은 건데, 이름은 알 필요 없어.

H는 딸이 ‘인-’으로 시작하는 것을 한 번 더 말해 주길 바랐으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팔로워는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이야.

— 삼만 명이.

— 응. 삼만 명이 내 글을 봐.

— 잘 했네.

H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밥숟가락을 들었다.

그즈음 나는 H의 세계에 거대한 도서관을 만들고 있었다. 도서관 책장은 말캉말캉하고 폭신하며 네모난 모양이 아니다. 말랑한 젤리 같은 부자재를 얻어 오며 나는 이명자의 설계자와 조금 더 친밀해졌던 것 같다. 이십 사 년을 살면서도 다른 인간의 설계자를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항상 홀로 보던 인간을 함께 내려다보니 생소했다. 우리는 공사장에서 1킬로가 넘는 무거운 포대를 등에 메고 발걸음을 옮기는 H를 바라보며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 세계를 만들어 줘야 할 인간들도 줄어들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상상이란 것을 하지 않으니까.

— 그렇겠죠. 이제 두려울 것도 줄어들고 인간의 삶은 점점 만족스러워질 테니까요.

— 어둠이 무섭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지.

H는 포대를 내려놓았다. 포대 주위로 흙먼지가 일었다. 연신 땀이 배어나오는 H의 목덜미로 미루어보아 폭염이 내리쬐는 한여름이었다. 인부들이 부지런히 자재를 옮기고, 벽돌이 가득 담긴 수레를 밀며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 이명자 뒤에, 다음 인간이 쉽게 배정되지 않고 있어요.

예전에는 바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에 착수해야 했다. 아침엔 내가 맡았던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고 점심엔 내가 맡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마주할 때도 있었다. 나는 이명자의 설계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내가 지나온 시간을 새삼 떠올렸다.

— 맡은 인간이 없어서 이렇게 쉴 수 있기도 하네요. H는 설계자가 두 명인 셈이죠.

— 든든하네.

— 부자재 더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젤리 재질은 제가 많이 모아놓았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H는 목에 두른 수건 끝으로 연신 땀을 훔치고 있었다. H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 다음 인간은 어떤 인간이었으면 좋겠어?

포크레인 움직이는 소리가 우우우웅, 침묵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명자의 설계자는 H가 세 번째 포댓자루를 내려놓을 때 즈음에 대답했다.

— 글쎄요. 일찍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명자의 설계자는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아마 새로운 인간이 배정되었을 것이다. 그 때 즈음 H의 세계는 큰 틀은 더 이상 손 볼 곳이 없었다. 나는 H의 하루를 지켜보고, 그가 잠에 들었을 때에는 H의 꿈에서 자재들을 얻어 오며, H의 세상에 들어갈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만드는 것에 온 힘을 쏟았다. 경양식 집에 놓을 촛대를 신중히 고르다 보면 하루가 지나 있었다. 나는 내가 설계한 공간만 볼 수 있었기에 이명자의 설계자가 만든 이명자의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지 공상했다. 불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뺐겠지, 하지만 세상에 온기를 빼면 무엇이 남나, 같은 이상한 생각도 했다. 촛대에 색깔을 정교하게 입히면서는 이왕 경양식 집을 만들고 촛대를 놓을 거면, 같이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병원에 오기 직전 H는 부엌에서 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노환으로 인한 병세가 심해지며 큰딸의 집에 얹혀살던 H는 식탁 끄트머리를 잡고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다 그만 냉장고 앞에서 넘어져버렸다. 그렇게 H는 병원에 입원했다. H는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 앉거나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저를 스스로 들 수도 없었다. 언제나 타인에게 친절하던 H의 서글서글한 인상은 점점 어두워졌다. 손녀가 찾아와도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고통을 참고 있던 날도 생겼다. 

H의 손녀 은주는 H의 자식들보다 훨씬 자주 그를 찾아왔다. 사실 그렇다기보다는 H의 자식이 그를 잘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생에겐 방학이란 것이 있지만 직장인에겐 방학이 없다는 것이 자식들의 흔한 핑계였다.

은주는 H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두유를 사 왔어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곤 했다. H의 말년은 은주가 있어 행복하지 않았을까. 윤기가 흐르는 짙은 검정색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올려 묶은 은주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H는 어쩌면 두 딸보다 은주와 더 친했다. H는 은주에게 그가 이전에 읽고 경험하고 들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두 딸과 달리 은주는 H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딸들에게도 한 적이 없던 이야기를 H는 은주에게 했었다. 물론 장롱 밑에 숨겨놓은 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학교를 가려면 논길을 따라 20분을 걸어야 했다는 이야기와, 그 당시의 정석 데이트 코스였던 경양식 집 이야기 같은 것들을 듣는 것을 은주는 좋아했다.

은주는 H가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일주일에 서너번은 병원에 와 H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H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요즘은 은주가 병실에 와도 함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날이 더더욱 많아졌다.

이젠 그저 죽었으면 좋겠다고 H는 이야기했었다. 창밖엔 벚꽃이 한창인 봄날이었다. 물론 H는 손녀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간병인은 소변통을 갈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오래오래 사셔야지요.

간병인은 그렇게 말하며 소변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병인은 젊은 시절 H가 남들보다 수십 개의 유리창을 더 닦아내었던 것처럼 손이 재발랐다. 간병인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그때 창틀에 앉아 있었다. 그날 H는 오래되어 거슬리는 소음을 내는 낡은 냉장고처럼 웅웅거렸다. 냉장고가 연식이 오래되었네요. 이건 고치기보다는 그냥 새 걸로 바꾸시는 게 돈이 덜 드실 겁니다. 나는 언젠가 냉장고 수리를 할 때 H가 하곤 했던 말을 엉뚱하게 떠올렸다. H는 부스럭부스럭, 쿨럭쿨럭 같은 소음을 만들어 내는 기계인 듯 가만히 누워 있었다. 네모난 방 안에 오직 그의 조그마한 소음이 떠다녔다.

나는 긴 회상에서 빠져나와 H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본다. 노인이 된 H는 볼품없이 줄어들어 있다. 나는 그 얼굴에서 내가 알던 과거의 모습들 -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진 청년의 모습이라든가, 작은 가정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줄에 매달린 그의 모습 - 을 찾아보려 했었지만 깊게 파인 주름만이 눈에 띈다. 

나는 성실한 설계자였으므로 H가 죽은 후에 가게 될 그의 세계는 이미 모든 공간들이 완성되었다. 말랑한 도서관과 풀내음 가득한 산책로와 두유 계곡 같은 것들. H의 세계를 천천히 거닐었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분 좋은 향이 났다. 이 향은 이명자의 설계자가 건네준 재료에서 추출한 이명자의 내음새다. 한 인간의 향을 한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그 향을 맡으며 이명자의 설계자를 떠올렸다. 

이 세계로 들어온 H가 처음으로 눈을 뜰 곳도 이미 정해 놓았다. 넓은 마당이 있는 한옥 집과 비포장도로, 쭉 뻗은 논길을 나는 만들었다. 책들을 대청마루에 쌓아놓으며 나는 그가 원하는 만큼 며칠이고 몇 달이고 무언가를 써 낼 수 있기를 바랐다. 이곳에선 그의 귀를 괴롭히는 시끄러운 소리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한옥집 마루에 앉아 있으면 새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흐르는 두유 계곡 소리라든가 잔잔한 바람 소리가 이곳을 이루는 소리였다. ‘삐-’하는 이명에 시달릴 일도 없다.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지도 않다. 줄에 매달릴 일은 더더욱 없다. 대청마루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산 너머로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 풍경을 H가 꽤 좋아할 것이라 믿는다.

나는 모든 구역을 돌아보고 하늘에 동동 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는 묘하게 가슴이 울컥했다. 이것은 설계자인 내가 만든 마지막 작품이다. 다만 H가 죽으면 나도 죽으니 나는 H가 내가 만든 마지막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볼 수가 없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그렇다. 어쩐지 쓸쓸한 아쉬움이 진득하게 남았다.

새벽이었다. 창은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 바깥이 보이지 않고 쌕쌕거리는 H의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만이 똑딱거리던 새벽이었다.

내가 옅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몸이랄 것은 없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그의 심장 박동이 요동치고 있다. 심박수와 연결된 자동 호출 버튼이 눌렸는지 복도가 발걸음 소리로 분주해지더니 문이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온다. 나는 내가 맡은 인간이 맞는 끝을 스물 세 번이나 보았다. 설계자가 된 처음엔 빨리 정든 인간을 잊을 수 있도록 눈을 감아 버리거나,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 있고는 했다. 나중에는 그들이 내가 만든 세계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간의 죽음이 다가오면 새로운 세계에서의 그들의 삶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나는 공중에서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다, H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젠 익숙해진 주름이 파인 얼굴, 고통에 찡그린 표정. 나는 H의 부모보다 H를 오래 보았으며, H의 자식보다도, 부인보다도 H를 오래 보아 왔다. 탯줄을 발목에 감고 나온 그가 이 세상에 첫 울음을 터트릴 때부터, 몸에 여러 줄들을 꽂고 서서히 쭈그러들 때까지 모든 시간을 H와 함께했다. 오랜 옛날 H와 나의 시선이 마주친 그 시골집을 나는 떠올린다. 담뱃갑을 펼쳐 놓고 글을 쓰던 자그마한 소년 H의 갈색 눈동자도.

그의 심박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부 장기에서 갑작스러운 출혈이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 다급한 말소리들 속에서도 H는 눈을 감고 있다. 한 인간을 오래 들여다보면 웃음보단 눈물이 나곤 했다. 강하고 유쾌한 인간이든 쉽게 아픈 여린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나는 H의 뚜렷한 죽음의 징후 앞에서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겪어 보지 못한 나의 죽음을 준비한다. 나는 나를 그리워 해 줄 존재도 그리운 존재도 그리워 할 순간도 사랑할 나도 없기에 서서히 옅어져가는 느낌은 그리 싫지는 않다. 설계자에게도 설계자의 세계를 만들어주는 설계자가 있을까. 문득 그런 것을 한 번도 궁금해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이제 창틀로 옮겨 앉을 수도,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없이 옅어지고 있다. 나를 스쳐 간 모든 인간과 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순간들을 떠올리며 나는 H의 감은 두 눈 위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H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소리도 점차 멀어져 간다. 나는 H의 주름진 얼굴을 눈에 담고 또 담는다. 그의 거친 입술이 펴지고 오므라들며 흘러나온 ‘여보’라는 이름의 부드러운 파동을 떠올리면서. 바싹 마른 팔뚝 안에 흘렀던 뜨거운 피와 고목나무같이 딱딱한 그의 손이 한때 만들어 내었던 따듯한 체온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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