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화(전기·정보공학부)
오석화(전기·정보공학부)

3년 전에 시를 쓸 때는 나 아닌 누군가에게 쓴다는 생각을 주로 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는 나 자신을 위해 쓴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슨 말이냐면 그때의 내가 학부생이었다면 지금은 대학원생이라는 것이고, 퇴근 후의 피로와 파도를 넘어 한 줄을 쓰기 위해 무던한 의지를 끌어와야만 했다는 것이며, 그마저도 쫓기는 시간과 떨어진 감각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자괴를 이겨 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글을 계속해 써 나가고 있고 이제 나는 (전업인 경우조차 거의 없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게 됐다. 무엇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쓰게 하는가? 대체 무엇이 보는 것을, 나아가 봤던 것을 다시 보는 것을 계속하게 만드는가? 박솔뫼 또한 그 질문과 더불어 내가 매료된 작가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소설 속 문장들을 미문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오히려 일상을 살아내는 몸 같은 그의 문장들, 어디 한 부분 마땅히 떼어놓을 수 없는 그의 글이 좋았다. 「그럼 무얼 부르지」는 예전부터 무척 좋아하던 소설이었으나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다 극장을 사버림」까지 읽고 나자 이것을 밝혀내야 한다는,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쓰고 나서는 비로소 내 안에 그를 합당하게 좋아할 수 있는 이유가 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사족이겠으나 이 글을 쓰면서 기존하는 아카이브로서의, 혹은 불가능을 무릅쓰고 진실에 육박하고자 했던 작가와 작업들에 자리를 거의 내주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픽션과 믿음이 정합하는 지점에서 역사가 발생한다고 믿지만 동시에 역사는 결코 말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는 정면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모든 시도들은 우리의 언어가 될 터이기에 무의미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유일하지 않다, 각자의 글을 쓰는 우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 글을 읽어주는 모두와 『대학신문』에게 감사드린다.

 

오석화(전기·정보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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