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서울대학교 학생이다
지금 나는 서울대학교 학생이다
  • 대학신문
  • 승인 2020.02.2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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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인 (동양사학과 석사졸업)
이옥인 (동양사학과 석사졸업)

2006년 3월. 서울대학교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고 겁 없이 차를 끌고 정문을 들어섰다. 7동 102호를 찾다가 접촉 사고까지 내면서 20분 늦게 중국 고대사 수업에 참석했다. 첫 수업이 끝난 후 거절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교수님께 “저는 방송통신대 학생인데 선생님 수업을 청강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교수님 대답은 허탈할 정도로 간단했다. “그러세요.” 이것이 2013년까지 이어진 동양사학과 청강의, 그리고 오늘까지 계속된 내 역사 공부의 시작이었다.

40대 후반이었던 이 나이 든 청강생에게 서울대학교는 더할 수 없이 친절했다. 청강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신 교수님들, 강의 자료와 조별 과제에서 언제나 배려해 줬던 학부생들, 심지어 항상 인사를 건네던 청소하시는 분들까지. 한 학기에 한두 과목을 들었던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좋아하는 역사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 친절함 때문에 무척 편안하기도 했었다.

청강생을 대하는 교수님들의 태도가 다 같지는 않으셨다. 투명 인간 취급을 하시는지 눈길조차 안 주시는 교수님. 반면에 너무 주목하셔서 손짓 하나도 조심해야 하는 교수님. 시험은 안 봐도 되지만(사실 시험을 보지 않아야 하는 청강생인데) 보고서는 꼭 써야 한다던 엄하신 노교수님, 깍두기는 안 된다고 발제·발표·보고서까지 다 해야 한다고 하시던 까다로운 젊은 교수님. 내 학부 졸업 논문 자료를 찾아 주시던 교수님. 영어가 서툰 내게 영어 강의를 오픈해 주신 교수님. 심지어 기말시험을 보라고 권하기까지 하시던 교수님 등. 태도는 다양하셨지만 모두 진정한 ‘내 선생님들’이셨다.

2013년 여름, 나는 중국 역사를 더 공부하기 위해서 감히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를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던 이 학교의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너무 간단한 자기소개서의 원서, 있는지도 몰랐던 터라 당황해서 더듬거렸던 구술시험, 기억이 나지 않아 쓰다 만 지필 시험 답안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합격했다. 동양사학과 선생님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일까? 온라인 대학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던 내게 그분들이 거시는 기대는 무엇일까? 과연 내가 끝까지 해낼 수는 있을까?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그 불확실성 때문에 약간의 희열과 많은 걱정을 동반한다.

무려 열두 학기의 내 대학원 생활은 걱정했던 대로 좌충우돌, 실수연발이었다. 전자는 엄마이자 딸로서 가족 내에서 내게 닥친 일 처리 문제였고, 후자는 학생으로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문제였다. 나는 참 운이 좋고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사돈 내외분을 포함한 가족들은 ‘공부나 하시라’며 내가 해야 할 일을 맡아 줬다. 대학원 선배들은 동양사학과 특유의 배려로 미숙한 나이 많은 후배를 감싸 줬다. 학과 교수님들은 내가 나이를 빌미로 해이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기꺼이 채찍질해 주셨다. 

특히 여덟 살이나 나이가 많은 제자를 받아 고생하신 구범진 지도 교수님께는 그저 죄송할 뿐이다. 이 나이 든 제자는 체력과 기억력에서 당연히 부족함을 보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고의 경직성이었다. 생각을 굴리는 것은 어떻게든 하겠는데, 생각을 쪼개거나 뜯어서 재배치하는 것은 단지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제자가 제출한 그 수많은 초고를 읽으시면서 얼마나 속을 태우셨을까. 이제 한고비 넘기기는 했지만, 앞으로 박사 과정에서 또 얼마나 속을 썩여 드리게 될까. 지금 받는 석사 학위는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가족, 사돈 내외분, 선생님들과 선후배들이 도와줬기에 이룰 수 있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객(客)으로 8년 동안 서울대학교를 드나든 나에게 대학원 6년은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지위를 자각하는 시간이었다. 석사 과정 내내 선생님들은 여전히 엄하시지만 친절하셨고, 학생들은 역시 배려가 넘쳤고, 일하시는 분들과는 항상 인사하고 지냈지만, 서울대학교를 내 학교라고 지칭하기에 조금 미안했다. 아마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6년의 석사 과정을 끝내고 간신히 졸업을 하는 지금, 나는 이제야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서울대학교를 ‘우리 학교’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옥인

동양사학과 석사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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