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인터뷰 | 국악과 16학번 조수황 씨

인터뷰 도중 조수황 씨는 〈춘향가〉의 〈쑥대머리〉 중 한 대목을 불렀다. 옥 중에서 이 도령을 그리워하는 춘향의 절절한 애원이 구슬픈 목소리에 절로 묻어나왔다. 잠시였지만 무대 위의 조 씨의 모습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인터뷰 도중 조수황 씨는 〈춘향가〉의 〈쑥대머리〉 중 한 대목을 불렀다. 옥 중에서 이 도령을 그리워하는 춘향의 절절한 애원이 구슬픈 목소리에 절로 묻어나왔다. 잠시였지만 무대 위의 조 씨의 모습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음대 느티나무 카페에서 만난 조수황 씨(국악과·16)는 모든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내온 삶에서 우러난 자긍심이 전해졌다. 조 씨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음대 학생회장직을 연임하고, ‘조수황국악연구소’의 대표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춘향가〉 이수자*로 활동하는 등 눈에 띄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지난 4년의 대학생활을 묻자 그는 “대표자라는 자리의 무거움을 실감했던 시간, 동시에 동아콩쿠르에서 상을 받는 등 국악인으로서 입지를 다졌던 시간”이라고 요약했다.

그가 걸어온 판소리의 길

전라남도 진도 출신인 조수황 씨는 어릴 적부터 소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조 씨는 소리꾼 집안에서 집안 어른들의 소리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던 중 그가 11살이 되던 해 국가무형문화재 신영희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에 큰 변화를 맞았다. 신영희 선생은 조 씨에게 음악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영희 선생은 판소리에 앞서 사람됨을 강조했다. 조 씨는 “많은 공연 경험이 쌓이고 나서야 소리꾼의 성격이 음악에 드러난다는 걸 깨달았다”라며 “신영희 스승이 이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영희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자신만의 소리를 가꾸어 나간 조 씨는 2016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로 선정됐다. 본래 소리꾼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를 비롯한 다섯 마당을 모두 할 수 있어야 하며, 뛰어난 소리꾼은 각 노래의 이수자가 된다. 조 씨는 신영희 스승과 그의 스승인 만정 김소희 국창이 〈춘향가〉 예능 보유자이기 때문에 두 스승의 가락을 이어받아 〈춘향가〉를 이수했다. 그는 “〈춘향가〉의 매력은 예술성, 문학성을 모두 갖춘 것”이라며 “20대가 사랑이라는 〈춘향가〉의 주제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라고 〈춘향가〉를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2017년 카자흐스탄 초청 공연을 계기로 조수황 씨는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소리를 마치니 관객들이 5분 동안 기립 박수를 쳤다” 라며 “판소리를 소중히 하는 관객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판소리의 인기가 더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판소리의 본고장인 한국에서도 판소리의 위상이 높아져야 한다고 느꼈다. 조 씨는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로서 국내외로 판소리 보존과 전승에 힘쓰고 싶다”라며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이어갈 것을 약속했다.

대학생활 중 4분의 3을 학생회와

소리꾼으로 외길 인생을 살아온 조수황 씨에게 대학은 특별한 곳이다. 홀로 판소리 연습에 전념해 온 그는 대학에 들어와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는 학생회 활동에 발을 디뎠다. 그가 신입생이었을 당시 음대에는 선후배 사이의 수직적인 문화가 만연했다. 이러한 경직된 음대의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조 씨는 학생회장에 출마하게 됐다. 조 씨는 “주로 3학년 학생이 학생회장으로 출마했기에, 1학년인 내가 학생회장에 나가는 것은 모험이었다”라며 “그러나 사회생활의 첫 단계로 여겨지는 대학에서부터 이런 관행을 끊어내 바람직한 선후배 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라고 출마 이유를 이야기했다.

학생회장이 된 조수황 씨는 음대 문화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새내기 새로 배움터’(새터) 행사를 폐지했다. 당시 음대 새터는 프로그램에 신입생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고 선후배 간 위계질서도 엄격했다. 그렇지만 그가 새맞이 행사를 영구적으로 폐지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학생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선후배가 만나는 자리는 반드시 필요하다”라며 “폐지 결정이 악습을 끊고 다시 건전하게 새내기를 맞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조 씨는 긴 학생회 생활에서 대표자의 책임이 절대 가볍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리더는 본인의 의견을 피력해 학우들이 따라오게 만들되 학우들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라며 “한쪽의 의견만 듣지 않도록 중용의 자세를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찾은 국악의 새로운 얼굴

한편 조수황 씨는 대학교에서 여러 수업을 들으며 완전히 새로운 음악 세계를 맞이하게 됐다. 국악계에선 음악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음악을 변형해서는 안된다는 입장과 창작을 통해 음악이 계속 변해야 한다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조 씨는 대학을 경험하며 그 두 입장 사이에서 변화를 겪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조 씨는 전통음악의 원곡을 변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윤정 교수의 ‘즉흥음악 실습수업’을 계기로 그의 생각에 바뀌었다. 수업 시간에 목소리나 악기를 제외한 새로운 소리를 활용해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음악을 창작하며 음악의 변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조 씨는 “음악의 세계가 넓어진 기분이었다”라며 “변형으로 음악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조수황 씨는 강의실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곳곳에서 배움을 찾아 나섰다. 국악과 선배들과 판소리의 한 종류인 남도민요를 합주했던 ‘남도민요 스터디’도 조 씨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서로 남도민요의 각 구절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한 후, 판소리의 합을 맞춰 본다. 그는 “사람마다 생각이나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노래에서도 다양한 소리가 나온다”라며 판소리를 합주할 때 소리에 더 신경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졸업 이후 조수황 씨는 학교에서의 배움을 바탕으로 학교 밖에서 판소리를 할 예정이다. 특히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로서 판소리의 후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 조 씨는 “판소리가 동시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보존되기 위해서는 현 시대에 맞게 변형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 시대의 양반 계층이 판소리를 향유하면서 기사에 불필요한 한문 표현이 추가됐다”라며 “지금의 판소리 가사는 조선 시대 이후로 바뀌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21세기는 인권이 대두되는 시기”라며 “판소리 가사에 남아있는 성차별적 요소나 비속어를 바꿔 나가야 한다”라고 부연했다.

조수황 씨는 “학교에서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회로 나갈 생각을 하니 두려우면서도 설렌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현재 조 씨는 졸업 이후 ‘국립창극단’에 입단할 준비를 하고 있다. 소리꾼으로서 그의 앞날에 밝은 미래가 오길 기원한다.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을 수료하고 기량을 심사받은 사람.

 

사진: 원가영 기자 irenber@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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