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중립’을 찾아서: 4·19와 『광장』의 60주년을 맞아
잃어버린 ‘중립’을 찾아서: 4·19와 『광장』의 60주년을 맞아
  • 대학신문
  • 승인 2020.03.15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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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민(국사학과 박사과정 졸)
김도민(국사학과 박사과정 졸)

올해 2020년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자, 1960년 4·19가 발생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8월 한반도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됐지만, 곧바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해 군사 점령이 진행됐다. 1948년 한반도에는 분단 정부가 수립됐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대 진영의 이분법적·극단적 대립은 냉전의 최전선 한반도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귀결됐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경험한 한반도에서 냉전과 분단의 적대적인 이분법적 선택지만이 존재했다. 최인훈의 『광장』 속 표현대로 195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허용된 상상의 범위는 ‘펼쳐진 부채의 끝, 테두리 쪽’뿐이었다.

냉전과 분단의 대립 그리고 독재로 치닫던 남한에서 펼쳐진 1960년 4월의 뜨겁던 ‘혁명’은 금지된 많은 것들을 열어젖혔다. 1959년 등단한 신인이자 1960년 만 24세 육군 장교 최인훈은 4·19가 만들어낸 “큰 시대가 열렸다는 정신적 해방감”에 휩싸인 채 “한여름 동안” 소설 『광장』을 집필해 그해 11월 『새벽』 잡지에 발표했고 1961년 2월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최인훈은 4·19가 만들어낸 사회적 해방감 속에서 냉전과 분단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선 ‘중립국’을 상상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중립국 송환 심사’에서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라는 질문에 이명준이 “중립국!”을 외치는 장면은 이분법적 적대의 시대를 살아온 당대 한국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1960년 4·19가 만들어낸 열린 공간에서 평화와 중립은 동시에 만개했다. 냉전과 분단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중립화 통일’이 주창됐다. 평화란 적대적인 냉전과 분단의 대립을 넘어선 곳에 존재했으며 그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적대적인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는 중립이 호출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 『광장』의 모티프인 한국전쟁 포로로서 중립국을 선택했던 주영복에게 중립이란 처참한 전쟁을 벗어난 평화이자 유토피아였다. 엄혹하던 1970∼80년대 『광장』은 대학생 필독서였으며 한국 지식인들은 이 소설을 통해 ‘중립’을 상상하고 복기했다. 1978년 서슬 퍼런 유신시대 역사학자 강만길도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에서 “분단현실과 그 극복 문제를 염두에 두고” 1885년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했던 유길준의 이야기를 담았다.

1960년 4·19가 열어젖히고 『광장』이 낳은 그 많던 ‘중립’은 다 어디로 갔을까? 냉전의 마지막 유물이자 한국전쟁의 종전(終戰)조차 못한 한반도라는 시공간에서 과연 남과 북이 아닌 제3의 선택지를 상상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2년 전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판문점에서 만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그해 이어진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북미 간 첫 정상회담은 오래된 적대를 청산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큰 전진이었다. 현재 답보 상태인 북미 간, 남북 간 관계가 개선된다면, 나아가 한반도 평화가 구체적인 ‘형태’로서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고 할 때, 반드시 평화와 중립이 불가분의 관계로서 호명됐던 4·19와 『광장』의 상상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오래된 분단이 낳은 적대성을 해체하는 데 중립과 평화는 함께 상상돼야 한다.

나아가 중립은 한반도 평화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커져가는 적대와 혐오라는 독소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분단과 전쟁은 끊임없이 우리 안의 이분법적 적대성을 강화시켜왔다. 적대하는 극단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나와 다른 타자를 만났을 때 이들을 혐오하거나 배제하는 데 급급했다. 우리는 타자와 만나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하고 배제하는 역사의 경로를 걸어왔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펼쳐지는 극단과 혐오의 모습들은 어쩌면 이분법적이고 적대적인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4·19와 『광장』이라는 사건으로부터 60년, 우리는 잃어버린 ‘중립’을 다시 호명함으로써 한반도 평화뿐 아니라 잃어버린 타자에 대한 감각까지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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