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훈 편집장
김용훈 편집장

“중립국” “중립국” “중립국” 그리 내뱉는 명준을 동정했다. 그는 이남에서 윤리 없는 자본주의를 목격했고, 이북에선 혁명을 가장한 길들임을 겪었다. 인생의 마지막 버팀목으로 붙든 연인은 전쟁에서 잃었고, 그 참화 속에서 자신의 인간성마저 놓칠 뻔했다. 켜켜이 쌓인 비극 끝에 그는 “중립국”을 외쳤다. 남과 북을 고르라는 감언이설과 겁박을 뒤로하고 그 밖을 택했다. 아니, 이를 선택이라 부를 수는 없다. 당초 그에겐 그 길만이 남았고, 그저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명준의 복을 깨닫는다. 그는 남북 모두를 경멸해 한반도에 발붙일 수 없을지언정,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지만 선택지가 단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의 두 독재는 자신을 거부하는 이들을 놓아주기로 합의했다. 인도적인 동기는 아니었겠지만.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 중립국은 막혔다. 여의도에는 양당이 서 있고, 양당은 자신을 거부한 이들의 표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4월의 투표지에 중립국은 적히되,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지난겨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호언했다. 양당이 누려온 특혜를 철폐하겠다고, 소수당의 원내 진입을 도와 다양한 뜻을 품어내겠다고, 이제 소수당에 던진 표는 사표가 아니라고. 그 약속이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렀다. 누군가 부끄러운 욕심을 참지 못해 위성정당을 차렸다. 곧이어 반대편의 누구도 질 수 없다며 스스로 공범이 됐다. 그들의 위성정당은 지역구 의석이 없다는 얄팍한 거짓을 고할 테고, 연동된 비례의석 30석을 쓸어 담고 그렇지 않은 17석을 주워 담을 것이다. 이제 정당 투표에서 소수당을 찍은들, 양당이 아닌 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표다.

소수당 지지자는 오갈 데 없는 포로 신세다. 지지하는 정당을 찍으면 표는 죽고, 그렇다고 양당에 가기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졸지에 햄릿이 되어 양당이 사무치게 미운데, 누군가 마이크를 들이밀며 묻는다. “민주당과 미래당, 누가 더 악한가?” 온당치 않은 질문이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잘못이 얼마나 불가피했는지는 사소한 문제다. 그 둘의 잘못을 견주는 일은 부차적이고, 핵심은 부당한 이득을 취한 범법자와 뜻하지 않은 피해자의 대조다.

그러나 세상은 거꾸로 돌아간다. 놀랍게도 양당의 지지율은 올랐다. 약속을 뒤엎고 과오를 범했는데, 그들은 외면받기는커녕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과 없이 정국을 수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0세기의 선배들을 뒤따르기만 하면 됐다. 남녘과 북녘의 독재자들이 상대의 악을 선전하며 수월히 독재했듯, 양당은 손가락질에 열중했다. “문재인 정권 심판의 대의를 위해서 손잡고 달려”(황교안, 2020.2.5.)가자며 독려했고, “미래통합당의 의석 탈취를 저지하기 위한 결단”(이해찬, 2020.3.18.)에 동참하길 촉구했다. 손가락질은 효과적이었다. 유권자는 그 으름장에 덜컥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양당은 시민의 공포로 지지를 굳혔고, 굳은 콘크리트 위에서 춤췄다. 찬란한 미래를 노래할 필요도, 금은보화를 내보여 유혹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광장은 당분간 혀와 손가락으로 어지러울 전망이다. 현란한 삿대질이 멈추면 우뚝 선 이는 양당일 것이요, 그 나머지는 이름 잊힐 전사자다. 중립국으로 향하는 다리는 지금도, 그다음 선거에서도 끊겨 있을 것만 같다. 찍을 데 없어 방황할 포로들은 투표지의 공란 밖으로 투신할 것이고, 그렇게 쌓인 무효표가 광장의 협소함을 설파할 것이다. 아, 명준도 뜨악할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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