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조선 도자기 기술, 그리고 기술 혁신 생태계

박희재 교수(기계항공공학부)
박희재 교수(기계항공공학부)

*편집자 주: '기술 혁신과 생태계' 기고에서 이어집니다.

임진년인 1592년 음력 4월 1일, 후쿠오카에서 출발한 약 15만 명의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들은 삽시간에 조선 전역을 전장으로 바꾸며 불과 보름 만에 수도인 한양을 점령했다. 임금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고, 백성들은 살상·납치됐으며 전 국토에서 약탈과 파괴가 자행됐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역사의 판도를 바꿔놓은 큰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의 혁신 기술이었던 도자기 기술과 사기장(沙器匠)* 등을 통째로 약탈해 갔던 혁신 생태계 약탈 전쟁이기도 했다. 특히 도자기 기술자와 사기장들이 배치된 전국의 주요 관요지(官窯地)에서 도자기는 물론이고 사기장과 그들의 가족들을 납치하거나 도구, 심지어는 흙까지도 약탈해 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일개 부대나 군사들의 일탈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한 거의 모든 군대에서 조직적·경쟁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당시 매력적이고 상업적인 가치가 높은 조선 도자기 기술을 약탈해 자국의 도자기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약 15000명의 병력으로 출전한 사쓰마번주(薩摩藩主) 시마쓰는 전주 남원성을 점령하고서 심수관, 박평의 같은 사기장과 도공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까지 끌고 가 사쓰마번의 도자기 생태계를 만들게 했다. 사가번주(佐賀藩主) 나베시마와 12000명의 군사들은 사기장이었던 이삼평과 도공들을 납치해 사가번의 도자기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많은 조선인 도공과 사기장이 규슈(九州) 등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규슈의 7대 조선 가마가 형성됐다.

일본에 정착한 많은 사기장과 도공들은 고향을 그리워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정치적 지위에 올라 혜택을 받으면서 일본 도자기 생태계 조성에 매우 큰 역할을 해 나갔다. 납치된 사기장 김존해의 1622년 일본 측 호구 조사 기록(주민 65인, 도공 8인, 판매원 10인, 말 7마리, 소 1마리 등)을 보면 조선 사기장들에게 웬만한 무사 계급 못지않은 정치적·경제적 지위가 부여됐음을 알 수 있다. 종전 후에 조선통신사가 일본 막부(幕府)의 허락을 얻어 조선인 포로들을 귀국시키려 했을 때 귀국 희망자는 거의 없었으며 모두 앉아서 도자기를 만드는 데만 열중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귀국을 저지하려는 일본 측의 방해도 있었겠지만,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생태계를 떠나 기술자를 관요지에 배치해 천민으로 지난(至難)하게 살아가게 하는 척박한 생태계로 다시 복귀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기술 종주국이었던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쇠락하고, 일본은 신흥 도자기 강국으로 일어선다. 그 배경에는 실용적 기술로 실리를 창출하는 기술자를 대우하고 합당한 보상과 영예를 부여하는 일본의 풍토와 생태계가 있었음을 우리는 반드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세계적인 명품이었던 조선의 도자기 제작 기술을 손에 넣은 일본에는 곧 글로벌 비즈니스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풍차 크랭크 기구를 개발해 회전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변환시켜 대량의 목재를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는 혁신적인 풍차 톱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네덜란드는 이를 바탕으로 대양 함선 제작 기술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일찌감치 암스테르담에서 나가사키까지 이르는 동아시아 항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한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를 통해 1600년부터 약 250년간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통해서 일본과의 독점 무역을 한다. 유럽으로 도자기를 대규모로 수출한 일본은 엄청난 국부를 축적하고, 그 과정에서 서양의 실용적 학문 체계인 난학(蘭學)을 받아들이는 혁신도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부를 축적한 일본의 번(藩)들은 사쓰마-조슈(薩長) 동맹을 필두로 서양의 군함과 대포 등을 구입해 군사력을 증강했고, 중앙 정부인 막부와 전쟁을 일으켰다. 1868년 막부의 항복은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져 일본의 근대화가 급진적으로 이뤄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이제 축적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통해서 조선을 또다시 침탈해 종국에는 강제적으로 조선을 병탄하기에 이르는 뼈아픈 우리의 근현대사에 닿게 된다. 

요약하면, 조선의 혁신적인 은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흘러가서 꽃을 피우고 이를 근간으로 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전쟁을 통해서 조선의 혁신 도자기 기술을 통째로 가져가 일본 생태계 안에서 꽃피게 한 일본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또 한 번 크게 키우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근대화를 이룩하고 종국에는 조선을 또다시 침탈해 식민지로 만드는 사태로 귀결시켰으니, 이는 기술 혁신과 생태계, 기술 혁신의 수용, 그리고 집단과 사회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이 돼야 할 것이다. 

*사기장(沙器匠): 사기 그릇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관요지(官窯地): 관청에서 쓰던 도자기를 만들던 가마터.

*이 글은 2019년 10월 26일 네이버 열린연단에서 필자가 강연한 원고 ‘기술혁신의 수용’에서 인용 및 요약을 거쳐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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