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원(국제대학원 박사과정)
나지원(국제대학원 박사과정)

20세기 정치경제학의 거장 로버트 코크스는 기념비적인 1981년 논문에서 이론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지배적인 사회 권력 관계와 그것을 구조화한 제도를 인정하고,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답을 내놓는 쪽은 ‘문제해결 이론’(problem-solving theory)이다. 반면 분석적인 문제해결 이론과 달리 전체론적 관점에서 사회 권력 관계와 제도를 당연시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며 그 기원을 따져보고 변화의 과정을 추적하는 쪽이 ‘비판 이론’(critical theory)이다.

‘큰 그림’을 본다는 점에서 얼핏 비판 이론이 문제해결 이론보다 우월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과 시간에 필요한 것은 문제해결 이론이다. 거창한 대의와 이념, 세계와 역사의 원리를 궁구한다고 우리에게 당장 먹을 것도, 살 곳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환율과 금리와 주가의 등락을 예측하고 오늘 위정자의 결정과 발표를 잘 해석해 통장 잔고의 숫자를 조금이라도 키울 책략에 가까운 이론이 더 유용하지 않겠는가? 맞는 말이다. 그 셈법이 통하는 세상이 지속되는 동안은.

개인의 삶에도 과거와 단절되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도 나오듯, 설령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시점들, 결혼, 출산, 부모의 임종처럼 나의 역할과 책임이 영영 바뀌어버리는 그런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그 문턱을 넘으면 예전처럼 행동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부모가 돼서 독신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식을 방기한 패륜으로 악명을 떨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렇듯 개인 차원에서도 한 시절의 문제를 잘 해결해주던 방식은 다음 시절로 넘어가면 완벽한 오답이 된다. 하물며 사회와 나라와 세계의 일을 살핌에서야 어떨까.

물론 익숙한 방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은 습관이라는 관성과 ‘귀차니즘’에, 국가와 같은 조직은 제도의 관성과 기득권의 저항에 발목을 잡힌다. 게다가 이제 예전 방식을 버려야 할 때라는 신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과연 기존 이론을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 수는 있을지, 무슨 득실이 있는지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의지와 지지마저 미적지근하다. 우리가 판판이 체중 조절에 실패하고 역사 속의 수많은 국가가 연거푸 개혁에 실패했던 이유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던 비판 이론이 바로 이 순간 제 목소리를 낸다. 오리무중 속에서 나아갈 길을 선명히 제시하고 따르라고 독려한다. 물론 모든 다이어트 기법이 옳은 방법이 아니듯 모든 비판 이론이 정답일 리는 없다. 게다가 남에게 맞는 이론이라고 나에게도 무조건 맞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대로 있다가는 결국 망한다는 사실뿐이다. 뭐라도 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우리 공동체를 어르고 달래고 끌고 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현상 유지 편향은 지독해서 불확실한 성공보다 확실한 실패를 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이미 일어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격변에 맞춰 삶과 세계를 총체적이고 선제적으로 바꾸는 작업에는 엄청난 힘(power)이 필요하다. 가지 않은 길에는 잠재적 위험과 온갖 의혹이 따르기 때문에 정치적 자원 소모는 극심하고 단기적 성과는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권력 수단이 부실한 국제기구들이 번번이 사후 약방문을 쓰는 듯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비겁하지만 단기적으로 효과적인 또 하나의 해법이 있다. 속된 말로 폭탄 돌리기, 우아하게 말하면 책임 전가다. 문제를 어딘가로 떠넘기고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게 하면 ‘어떻게든’ 해결된다는 속 편한 해결 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심지어 팬데믹이 휩쓰는 이 시국에도 세계의 많은 높으신 분들에게 좋은 도피처가 돼 준다. 오죽하면 영어에도 ‘sweep under the rug’나 ‘bury your head in the sand’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눙치고 넘어간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고 찬장 위의 먼지처럼 차곡차곡 쌓이다가 결국 쏟아져 나와 온 집안을 망쳐놓는다. 지금 겪고 있는 미증유의 재난 또한 그렇게 깊고 넓게 얽힌 세계화의 혜택만 취하면서 비용과 폐해는 못 본 척 미루고 구석에 밀어놓은 결과다.

역사학자 발터 샤이델은 인류의 불평등은 역사적으로 오로지 기근, 역병, 전쟁과 같은 외부 충격으로만 완화됐다는 암울한 분석을 하면서,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시험받을 첫 세대가 바로 우리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중간고사는 막막하지만 방구석에서 화면 속 강의를 듣는 우리 모두에게 그 시험은 이미 시작됐다. 몸은 각자 좁은 곳에 갇혀 손으로는 달고나 커피를 4,000번 젓고 있어도 머리로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다. 시험에 낙제하면 더 심한 격리와 단절이 기다린다. 큰 그림은 제시했지만 정치적으로 실패했던 혁명가의 경구를 비틀자면 “당신은 역병에 관심이 없지만 역병은 당신에게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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