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進步)에 대하여
진보(進步)에 대하여
  • 대학신문
  • 승인 2020.04.06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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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욱 교수(법학전문대학원)
허성욱 교수(법학전문대학원)

2020년 4월, 대한민국과 전 세계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의 충격과 혼란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바이러스는 잦아들겠지만 이번 사태가 개인과 공동체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속될 것이고, 우리는 코로나 이후 그 전과는 완연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와 그에 이은 정치의 계절을 지나면서 대한민국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진보’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며 그에 헌신하는 인적 자원의 풀을 전면적으로 다시 채우는 일이다. 지난 탄핵 정국 이후 지금까지 많은 지식인들이 보수를 상대로 경제 성장과 산업화 이후 제대로 된 서사(敍事)를 만들지 못한 것을 비판했으나, 최근 3년여의 기간 진행된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 우리에게는 그만큼이나 절실한 것이 진보의 새로운 서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권력의 지위를 갖게 된 진보에 대해서는 더 그러하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진보’는 희소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원의 바람직한 배분 메커니즘으로서 시장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시장 실패의 국면에서 정부와 국가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들에 대한 냉철한 이해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국가 권력의 본질은 결국 ‘공동체의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권위 있는 배분’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고 여기서 ‘권위 있음’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니 실은 대부분의 경우에, 수범자의 자발적인 의사에 반하는 강제력의 행사를 용인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권력을 가진 진보가 언제까지나 대중들을 상대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서 당신들을 더욱 평등하고 유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것으로 결국 공동체의 미래를 파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진보적 지식인’은 자신이 맡은 전문 분야에서의 압도적인 실력과 품격을 갖춰야 하고, 적어도 자신의 언행과 실체 사이의 위선이 없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나약하고 인생을 살면서 여러 형태의 약점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모든 공적 인물과 지식인들에게 성인과 같은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과 같이 우수한 인적 자원이 거의 유일한 자원인 국가에서는 공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겠다는 사람은 각 전문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과 품격을 인정받은 사람들이어야 하고,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아야 한다. 그 위선이 뒤를 따르는 자들에게 출세의 경로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순간 공동체의 진보적 미래는 존재할 수가 없다.

‘진보 진영’은 세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국제적 감각과 경험을 갖춰야 하고, 혁신적 사고가 가져올 수 있는 비선형적 세상의 창조적 파괴의 가능성에 늘 주목하고 있어야 한다. 빠른 추격자로서 제조업 분야의 눈부신 성취를 이룬 대한민국에게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는 가치 창출의 기회는 많지 않다. 결국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혁신적이고 탄력적인 사고의 체계가 진영 내에서 폭넓게 공유돼야 하는데, 30여 년 전 기계적으로 답습했던 저항과 투쟁의 갇힌 사고가 기득권화된 동지 의식으로 진보를 방해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이전 세대에 비해 월등하게 자유로운 사고를 하고 기회만 잘 주어지면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창의적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의 그 갇힌 사고들이 질곡으로 영향을 미치고 진보적 창조의 기회를 박탈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진보적 정치’는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의 정치적 사유화’의 사슬을 끊어 내고,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이 문제의 해결에 가장 필수적인 덕목임을 기본 가치로서 공유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구보다 정이 많고 감성적 공감 능력이 크다. 그러나 매우 아쉽게도 주요 비극적 사건·사고의 국면에서 특정 정치 그룹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타인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챙기곤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제는 그 나쁜 순환을 멈춰야 한다. 연대하고, 공감하며, 포용하되, 그 바탕에는 냉철한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진보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더 이상 낡은 관념과 철 지난 선동이 국가와 공동체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그 ‘진보’의 이름을 참칭하고 더럽힌 이들이 있다면, 새로운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온전히 청산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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