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출발한 컷 속 이야기들
나로부터 출발한 컷 속 이야기들
  • 오지형 기자
  • 승인 2020.04.07 0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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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신일숙 작가
사진 제공: 신일숙 작가

만화방에서 오백 원, 천원으로 만화를 보며 유년을 보냈던 오늘날의 30대에게 신일숙 작가의 만화 『라이언의 왕녀』(1984), 『아르미안의 네 딸들』(1986), 『리니지』(1993)는 모두 익숙한 작품일 것이다. 신일숙 작가는 1984년 만화 『라이언의 왕녀』로 만화계에 처음 등장해 오늘날 전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두터운 팬층을 지닌 작가로 성장했다. 2020년 2월 한국만화가협회의 28대 회장으로 부임한 그를 만나 그의 일생과 생각을 들었다.

한국 순정만화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다

신일숙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개척해온 1세대 만화 작가다. 신 작가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신창공업사’에서 경리로 일하기 시작했다. 공장 일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입사한 지 1년 반 만에 공장이 문을 닫자, 자연스레 그곳을 떠나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향했다. 그는 순정만화를 따라 그리며 만화가를 꿈꿨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서울의 출판사를 찾아갔다. 신 작가는 “1980-90년대에는 만화계의 등용문이 좁았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유명한 만화의 단행본 제작을 도우며 만화를 배웠다”라고 말했다. 신 작가는 유명한 작가를 스승 삼아 그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점차 자신만의 작품관을 구축했다. 그는 “당시는 내가 직접 구상한 스토리와 캐릭터도 스승의 이름으로 출간됐다”라며 “내 이름을 단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다른 작가의 작업을 보조하는 데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라고 회상했다.

신일숙 작가가 만화계에 뛰어든 80년대 초, 우리나라의 순정만화는 충분한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정만화는 그림체에 따라 독자에게 선택받거나 외면받았고, 그렇기에 수요가 일정하지 않았다. 당시 만화책은 소위 ‘대본소’라 불리는 만화방을 통해 유통됐는데, 신 작가는 “대본소는 순정만화를 독자들이 쉽게 외면하는 장르라고 여겼다”라고 설명했다. 만화책의 유통과 보급에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대본소’가 순정만화를 꺼리니, 국내에서는 순정만화가 부흥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일본의 순정만화가 하나둘씩 한국으로 들어오며 국내에서 순정 만화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졌다. 그런 배경에서 김혜린, 강경욱, 그리고 신일숙 작가는 80년대에 활동을 시작해 한국 순정만화계의 입지를 다졌다. 그들은 1세대 작가로 평가되며, 이후 2, 3세대는 1세대 작가를 계승해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만화풍을 만들어갔다.

세월의 영향을 받지 않는 스토리

신일숙 작가는 “내 성격을 쪼개 작품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한다. 신 작가 자신의 모습, 성격, 행동으로부터 만화의 캐릭터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진취적인 여성이 자주 출연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신 작가는 “내 생활에서 남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라며 “남녀의 연애 작품에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라고 기억했다. 그는 여성이 남자에 매여 종속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반감을 갖고 있었고, 평소 역사 소설을 읽으며 ‘카트리나 스포리차’ ‘엘리자베스 여왕’ 등 르네상스 시절의 독립적인 여성상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신 작가의 생각은 그의 작품에서 드러났다. 그는 수동적인 여성의 사랑 이야기로만 여겨진 순정만화의 관습을 깨고 여성을 작품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대표적이다. 작품의 네 주인공들은 독자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다. 여왕 ‘레 마누’는 왕국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왕녀 ‘샤르휘나’는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홀로 여정을 떠나는 등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적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일숙 작가가 자신의 모습에서만 영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신 작가는 판타지 만화를 주로 그리는데, 허구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과정에는 풍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에 신 작가는 책과 영화, 친구와 나눈 이야기, 꿈 등 자신의 경험에서 상상의 기초를 얻고 만화의 모티프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리니지』도 꿈속 체험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꿈에서 벌어졌던 아덴 왕국의 왕위 다툼을 작품에 활용했다”라며 ”꿈에서 만화가 자주 펼쳐진다. 내레이션과 함께 개성 있는 성격의 캐릭터가 등장해, 이를 만화로 끌어온다”라고 말했다.

또한 신일숙 작가는 장편 만화가 하나의 세계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드는 만화의 ‘생명력’을 중시한다. 생동감 있는 만화를 만들기 위해 신 작가는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에 걸쳐 하나의 장편 만화를 고심한다. 핵심은 작품 속 사건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그는 만화를 그리는 과정을 기차역에 비유한다. 그는 “주요 사건이 큰 역이고, 부수적인 사건은 큰 역에 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작은 역”이라며 “큰 역은 쉽고 재밌게 그릴 수 있지만 작은 역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지루하고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독자도 작은 역보다 큰 역에 관심을 갖지만,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만화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작은 역을 필수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만화를 책임질 작가들에게

신일숙 작가가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 35년이 지나는 동안 만화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만화가들이 공장의 부품처럼 기계적으로 만화를 그려냈던 80, 90년대와 달리 요즘은 만화 작가끼리 팀을 꾸려 웹툰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신 작가는 “팀에서는 일원이 노동을 착취당한다기보다 개개인이 주관을 갖고 작품 제작에 일조한다”라고 설명했다. 신 작가도 현재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 페이지 등에서 웹툰을 그리는 중이다. 신 작가는 “웹툰계에 유료화 제도가 생기면서 작가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라며 “강압 없이 자신이 그릴 작품을 자유롭게 정하는 모습이 정착돼 뿌듯하다”라고 밝혔다.

신일숙 작가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최초의 여성 회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 작가는 “여성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말라”라고 조언한다. 만화를 그리는 데 있어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보다 만화 작가라는 정체성을 우선시하면서 작품을 구상해야 한다”라며 “만화가는 스스로가 남자 작가인지, 여자 작가인지에 얽매이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일숙 작가는 회장직에 임하면서 만화가를 위한 지원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그는 무명 만화 작가가 더 나은 작업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경제적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신 작가는 “대다수의 신진 작가는 다작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과 당장의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 사이에서 고민한다”라며 “눈 앞의 금전적 이익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대중에게 알려진 성공한 작가보다 그렇지 못한 작가가 더 많다”라며 “무명 작가도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으며 작품을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신일숙 작가는 신체적인 건강이 유지되는 한 계속해서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다만 그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몸이 많이 상했기에 잠시 휴식기를 가지면서 다음 작품을 구상할 계획이다. 신 작가는 “긴 시간 동안 앉아서 작업하는 만화가에게 건강이 중요하다”라며 후배 작가들에게 건강을 챙기라는 따뜻한 조언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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