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란 무엇으로든지 여러 사람 화두에 오르내릴 기사가 있어야 그거 어느 잡지에서 봤느냐 어쨌느냐 하고 그 책을 찾게 되지……” “사실이야 아무래도 뻔쩍 뜨이는 큰 ‘에로’ 제목이 하나 있어야 돼, 더구나 봄인데.”

이것은 1931년에 발표된 이태준의 단편소설 「아무 일도 없소」 첫머리에 나오는 어느 잡지사 편집회의의 장면이다. ‘나의 붓은 칼이 되자’ 주인공은 이러한 각오로 기자가 됐다. 그러나 잡지를 팔기 위해서는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것을 취재해야 한다는 편집국장의 지시에 떠밀려 ‘에로’의 소재를 찾아 나서게 된다. 『에로 그로 넌센스-근대적 자극의 탄생』(소래섭, 살림, 2005)이라는 책은 1930년대 대중을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우스운 감각적 자극이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에로, 그로, 넌센스’가 조선에 도입되면서 1930년대 전후 언론들은 앞다퉈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보도했다. 근대적인 산업 구조로의 변화, 여러 이념 대립과 국제정세의 급변, 1929년 대공황 이후의 불황, 그리고 근대 도시가 유발한 피로를 위로해 준 것이 바로 그러한 감각적 자극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공론을 대표하는 언론이 과연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회의는 초기 한국 근대문학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테마다. 가령 김동인은 어느 글에서 “지상에 흐르는 글자”를 보지 말고 “종이 아래 감추어 있는 글자”를 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단편소설 「딸의 업을 이으려」는 어느 잡지사 탐방 기자가 신문에 누차 발표된 적 있는 사건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고 보니 신문에 게재된 소위 사실이라는 것이 모두 오해였다는 것을 그리고 있다. 자극적인 사건의 표면적 사실에 대한 보도는 삶의 진실, 그리고 인간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 보도는 거짓 없는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언론이 진실보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욕망에 편승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충동질하는 행태는 요즘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언론 기사는 ‘단독’이나 ‘최초’라는 머리말을 달고 점점 더 신속하게 소비되고 있으며, 이는 기사가 지녀야 할 책임감과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더구나 유사언론의 ‘지라시’가 마구마구 증식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불안심리를 타고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최근에는 ‘n번방 사건’의 주범에 관한 자극적인 보도 경쟁에 대하여 언론이 범죄자의 확성기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언론 보도가 약자나 피해자의 확성기가 되지 못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현미경도 아니며, 시대의 치부를 찌르고 그 환부를 도려낼 수 있는 칼이 되지 못하는 점은 언론은 물론 대중도 고민해야 할 문제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면서 무기력감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것을 일컫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아직 코로나19의 불안은 끝나지 않았고, 코로나 블루와 같은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대중은 어떠한 자극을 찾을지도 모른다. 대공황 이후 ‘에로, 그로, 넌센스’가 유행했듯이 말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자극적인 사건이나 표면적 사실만을 보도하는 데서 나아가 칼로서의 붓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유예현 간사

삽화: 김지온 기자 kion2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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