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태(사회학과 석사과정)
한종태(사회학과 석사과정)

어떤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어떤 음악을 듣지 말아야 하는지 배운 적은 없었다. 표절 논란이 있었지만 가수 문문의 〈비행운〉은 이른바 역주행을 통해 유명해졌다. 이어 불법촬영을 한 과거가 알려졌다. 주변 친구들의 재생 목록에서 해당 가수의 곡은 지워졌다. 얼마 전 재생된 〈결혼〉의 커버 영상은 익숙한 선율을 이어 가수와 범죄를 떠오르게 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 댓글을 보았다. 많은 댓글이 “차마 원곡은 좀 그렇고 이 노래를 들으러 온다”라는 반응이었다.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표절 논란에도 계속 들었을까? 왜 이제는 원곡을 못 듣는 걸까? 그 기준점은 자신을 향해 있을까 타인을 향해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가 그다음 질문이 됐다. 그래서 한동안 친구들을 괴롭히며 답을 찾아다녔다. “그냥”이라는 대답들 속에서 한 친구는 그 가수에게 돈이 가는 게 싫어서 안 듣는다고 했다. 새로운 시각에 공감하면서도 어딘가 해소되지 않은 느낌도 들었다. 소비 행위는 금전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고 그런 생각은 일종의 혐오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서는 친구처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가수와 음악을 싫어함의 범주에 묶어두어야 했다. 이어서 그 노래를 좋아했던 과거의 나를 부정해야 했다. 또래들처럼 나의 10대에는 빅뱅이 있었고 20대에는 검정치마도 잔나비도 있었다. 약간은 억울했다.

질문은 꼬리를 물었다. 대부분의 소비에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TV 속에는 혐오를 희화화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범법 행위를 저지른 연예인들도 출연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시인 서정주나 김지하의 시 자체는 “괜찮다”라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소비가 괜찮은가에 대한 질문은 까맣게 잊은 듯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웃기니까 혹은 사죄했으니까 하고 넘겨버리기에는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사건에 경중을 매기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용서의 영역과 혐오의 영역에 선을 긋고 분류를 하는 게 가능한가? 창작자와 작품을 분리하는 일이 가능한 걸까? 대답은 꾸준하게 양가적이었다.

단위가 커지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배달의 민족’이나 ‘애슐리’는 편하니까 혹은 대체재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소비하면 되는 걸까? 모 연예인이 남긴 성 상납 명단에 분노하던 사람들은 ‘진로’에서 나오는 맥주와 소주를 마실 때 어떤 생각을 할까? 타협하다가 또 다른 ‘버닝썬’이 생겨나고 ‘위디스크’도 사용되는 게 아닐까? 분명하게 그건 좀 싫었다. 문제는 소비의 결과가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이처럼 소비에 대한 질문은 일견 단순해도 어려운 경우가 훨씬 많다. 흑인이 흑인을 비하하는 스탠딩 코미디 영상을 보며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유쾌하게 즐기면 되나 아니면 불편해야 하나 고민했다. 고민조차 다른 모습의 차별이 되기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해학과 풍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자기혐오를 담은 글을 읽을 때 어느 지점까지 괜찮은지도 궁금했다.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에서 끊임없이 기준을 세우려 했다면 그 기준점은 어디에 두었을지 배우고 싶었다. 옳은 방향이 있다면 어디가 옳은 쪽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라는 문제를 철저히 개인들의 몫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단면만 봐서는 그 깊은 구조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감독 김기덕의 영화도 가수 정준영의 음악도 없어지지는 않았고 기호에 따라 언제든지 소비할 수 있다. 배우 이병헌이 작품을 참여하면 연기력에 대한 뉴스가 쏟아진다. 터널과 기차를 질과 남근에 비유하고 고양이를 죽이고 싶다던 감독 봉준호는 상을 받자 국위 선양의 영웅이 됐다.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짧고 뻔한 나의 식견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소비든 타인을 검열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함께 화내었던 일이라면 무심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변명이 필요한 소비 대신 떳떳한 소비가 하고 싶다. 그러면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들어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으리라 믿는다. 다만, ‘퀴어’라는 단어를 재전유했듯, 문제시되는 소비 대상의 의미를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에 대한 답은 아직 고민 중이다. 그러니 묻고 싶다. 도덕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자리를 내준 사회에서 당신은 어떻게 소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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