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억(인문대 교수ㆍ국사학과 )

현 정부의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제정 노력과 관련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한 노교수의 글이 물의를 빚고 있다.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켜 준 ‘축복’이므로 친일행위가 반드시 반민족행위는 아닌데도, 현 정부가 과거사 진상규명을 추진하는 것은 장기집권을 위한 좌파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친일보다 더 나쁜 건 친북’이라며 거드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켜 주었다는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논리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미 한국이 나름대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한국을 ‘근대화’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을 일본의 한 부분으로 영원히 편입하고 ‘동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빠져 있다.

한편 시혜론이 계속 제기되는 우리의 현실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그것이 일제 자본의 원활한 활동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전통과 단절되고 억압적인 것이라 해도 그들이 근대적 제도들을 도입한 것은 사실이며, 그들을 통해 근대 학문과 과학을 배운 것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방 후에도 식민지 유산은 정리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활용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와 그 기간 동안 일제가 저지른 온갖 죄악과 그에 협조한 친일파는 용서할 수 없다 해도, 우리 사회가 경험한 커다란 변화와 해방 후 역사의 전개에 대해서는 조금 더 냉철하고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런 주장에 크게 반대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고약한 것은 과거청산 문제를 이념 논쟁과 연결시키려는 태도이다. 남북한 사이의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다. 여전히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세계 질서 속에서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이 온전한 주권국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결국 천년 이상 한 국가였던 남북한이 통일하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그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쟁을 막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북한을 포용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찍이 신채호는 주의(主義)가 들어오면 그것이 ‘조선의 주의’가 되지 못하고 ‘주의의 조선’이 되어 버린다고 개탄한 바 있다.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 논쟁일랑 집어 치우고 우리 민족 앞에 놓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량을 모을 때인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