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전시 '화이트랩소디'로 흰색을 재해석하다

전시장이 온통 하얗다. 관람객은 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백색의 의미를 곱씹는다. (사진 제공: 우란문화재단)
전시장이 온통 하얗다. 관람객은 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백색의 의미를 곱씹는다. (사진 제공: 우란문화재단)

새로운 발견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우란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전시<화이트 랩소디>는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백색’의 의미를 낱낱이 분석함으로써 백색을 새롭게 정의했다. 김경태, 신현정, 여다함, 주세균, 최고은 작가는 이 전시를 위해 2019년 7월부터 백색의 진짜 의미에 관해 토론했으며, 그 결과로 새로운 백색의 의미를 담은 작품을 공개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백색’의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아카이브 형식*으로 펼쳐져 있다. 책을 읽으며 관객은 자연스레 역사 속에서 백색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상기한다. 전시실 바닥에는 온통 계단이 깔려 있어 관람객은 울퉁불퉁한 지형을 오르내리며 백색의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간다. 

누구나 백색을 떠올릴 때 ‘백색 가전’ ‘백의민족’ ‘백자’를 연상할 만큼 백색의 의미는 한정적이었다. 곧 이전까지 백색은 공예, 예술, 건축 등의 분야에서 고유한 의미를 형성해왔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색다른 백색의 의미가 드러난다.

전시실 바닥에 설치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모퉁이에 놓인 작은 도자기들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계단의 흰 배경에 묻혀 평범한 흰 도자기 같지만, 이 작품에 가까이 가면 자기 표면에 잔뜩 묻어있는 분필 자국이 보인다. 반듯한 검정 도자기의 표면에 매끈한 유약을 바르는 대신 분필로 여러 방향의 곡선을 그려 넣은 주세균 작가의 조형물 「트레이싱 드로잉 W-2020-#2」이다. 주 작가는 전통적 공예기법을 탈피해 백자를 만듦으로써 ‘공예’를 새롭게 정의했다. 

계단의 중반쯤 도착하면 전시장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는 거대한 작품이 눈에 띈다. 옥양목*, 실크, 무명천을 연결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신현정 작가의 조형물 「운명의 세 여신」이다. 스테인리스 틀 위에 옥양목과 전등을 걸어 놓은 작품이다. 바느질이 돼있는 옷감은 조명의 빛을 받아 부각된다. 회화를 전공한 신 작가는 천의 표면에 회화적 실험을 해왔다. 그는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화폭에 그려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캔버스 천에 그림을 그리기보다 천 자체를 설치작품으로 이용해 작가의 소중한 기억을 형상화해 보여준다. 관람객의 작은 움직임에도 크게 반응하는 천은 기록의 수단이 아닌 기록물 그 자체인 것이다.

전시장에 놓인 마지막 계단에 다다르면 서로 다른 질감으로 된 여섯 면의 사각기둥이 네 개로 배열된 것을 볼 수 있다. 나무, 유리, 거울 등 인테리어에 사용되는 재료로 만들어진 최고은 작가의 조형물 「The Sum」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빠르게 버려지는 ‘백색 가구’는 우리가 평소 자주 접하는 물건이기에 관객은 직육면체 조형물에 손잡이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해 조형물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다가 이 조형물이 단순한 추상작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통속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한 끝 차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전시, 영화 등 각종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경로가 줄어들었다. 작년 7월부터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꾸준히 준비해온 이 전시는 이후 「화이트 랩소디」라는 작가별 연구자료를 담은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문화생활을 즐기기 어려운 지금, 쉽게 지나쳤을 법한 전시를 독자가 사진과 글로나마 만나볼 수 있길 바라본다.

 

*아카이브 형식: 소장품이나 자료 등을 디지털화 하여 한데 모아서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한 전시 형식

*옥양목: 평직으로 짜서 표백한 면직물의 하나. 무명실을 이용해 넓고 곱게 짠 천으로 두께가 색깔이 매우 희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