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서평 |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한 페미니즘으로

오늘날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목도한다.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한 페미니즘 논쟁은 종종 서로에게 혐오 표현과 비하 발언을 남발하는 ‘젠더 전쟁’으로 변질되곤 한다. 이는 결국 극단적인 의견 대립으로 번져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오해를 낳는다. 그리고 논쟁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대화 주제로 적절하지 않은 것이라는 선입견을 안긴다.

조안나 윌리엄스의 『페미니즘은 전쟁이 아니다』와 크리스틴 J. 앤더슨의 『여성혐오의 시대』는 페미니즘의 주장들을 둘러싸고 극단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현 시점에서, 젠더 불평등 문제의 기원으로 돌아가 페미니즘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태동했는지 살핀다. 두 저자는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가 부여한 성 역할에 저항해 인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본다. 따라서 일부 페미니즘의 논리가 극단적인 양상을 띤다고 해서,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의식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일방적인 이익 담론이라는 단편적인 이해를 교정하고, 페미니즘을 건전하게 논하기 위한 틀을 제공한다.

 

페미니즘은 편 가르기가 아니다

조안나 윌리엄스의 『페미니즘은 전쟁이 아니다』는 현대 사회의 페미니즘에 드리우는 ‘편 가르기’의 양상을 경계하며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젠더 권력’의 개념을 오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젠더 권력은 성별에 따라 권력 관계가 발생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는 젠더 권력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언제나 대립적인 관계이며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인식한다. 그들은 남성의 권위적인 태도가 권력 관계를 유발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방향성도 여성이 남성의 권력을 빼앗는 형태로 전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불필요한 성별 대립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의 구상을 “제로섬 게임”으로 왜곡할 여지를 제공한다.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우리 사회에 이를 어떻게 정착시킬 수 있을지 논하기보다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논하는 데만 힘을 소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 가르기’가 심화되면 최악의 경우 ‘피해자 여성과 가해자 남성’이라는 구도가 고착돼, 영구히 해결 불가능한 싸움이 돼 버릴 수도 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이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질 것을 요구하며 시작한 페미니즘 운동의 본래 취지를 훼손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가 일반화되면 오히려 성별과 성별 사이에 벽을 세워 화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런 가운데 남성은 ‘악마화’돼 모든 차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그래서 윌리엄스는 우리가 성별이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을 타파하는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페미니즘 논의의 출발점을 남성에 의해 여성의 권리가 억압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리지 못했다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윌리엄스는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입장만을 생각한다는 세간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금의 페미니즘에 인간적인 공감이 결여돼 있다는 진단이다. 윌리엄스는 여성이 그간 받아왔던 사회적 억압들을 공격을 위한 무기가 아닌, 설득을 위한 근거로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성의 관점보다 ‘인간’의 관점을 택할 때, 그리고 인간으로서 성별 때문에 겪는 불합리함을 토로할 때 사람들은 더욱 귀를 기울일 것이다. 남성 역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경험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별 간 단절이 아닌 소통을 장려하는 페미니즘을 지향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차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특정 성별이 아니라 성별을 기준으로 사회적 역할과 책무를 양분하는 사회 구조에 있다. 역사 속 여성 운동은 그와 같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차원에서 전개돼 왔다. 윌리엄스에 의하면 20세기 초중반부터 전개된 여성 운동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해방을 위해 “강하고,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여성관을 발전시켰다. 여성들은 동일 임금 운동, 참정권 운동 등에서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여성도 할 수 있음을 증명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천명했다. 윌리엄스는 이런 역사가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이 꾸준하게 발전해 왔음을 증명하듯이, 페미니즘이 앞으로도 여성과 남성이 인간 대 인간으로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의 대명사화: 현대 사회의 안티 페미니즘

그렇다면 극단적인 논지를 펼치는 페미니즘만이 문제일까? 일부 페미니즘의 기울어진 담론을 수정하는 것만으로 갈등이 종식될 수는 없다. 부분적인 사례를 일반화해 페미니즘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안티 페미니즘’도 큰 문제다. 안티 페미니스트는 “과업을 모두 달성했으니 페미니즘은 오늘날 더 이상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고용 및 임금, 교육, 참정권과 같은 분야에서 평등이 실현됐으므로, 여성에 대한 직접적 성차별 문제가 모두 해소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들은 모두 현실성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가운데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는 “일단 걸러야 할 것”으로 대명사화된다.

크리스틴 J. 앤더슨은 『여성혐오의 시대』를 통해 가부장제가 규정한 ‘남성성’과 ‘여성성’이 여전히 현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성차별의 일종인 여성혐오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일례로,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여성에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부각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여성성이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라고까지 주장하며, 여성을 성 상품화하는 컨텐츠를 양산한다. 앤더슨에 따르면 여성을 성적 만족을 위한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한 여성혐오다.

현대 사회의 성차별은 주로 온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앤더슨은 ‘온정적 성차별’이라는 개념을 통해 오늘날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과거보다 훨씬 교묘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삶에 파고들었음을 역설한다. 온정적 성차별은 순종적인 여성상을 훌륭하다고 여기고, 여성을 남성의 보호가 필요한 약자로 인식하는 경향성을 뜻한다. 온정적 성차별주의자는 상냥하고 가정적인 여성을 “훌륭한 여성”이라 칭찬함으로써 이들이 스스로 수동적인 여성상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때문에 온정적 성차별은 겉보기에는 성차별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온정적 성차별은 여성들에게 남성의 보호가 제공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회적 배려로 비춰지곤 하기 때문이다. 앤더슨에 의하면 이렇듯 성차별이 ‘은근히’ 자행됨에 따라 페미니스트가 제기하는 성차별 문제들이 겉보기에는 “이제 쓸모없는 주장”으로 간주된다. 앤더슨은 이런 가운데 안티 페미니스트 스스로는 본인이 성차별을 저지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안전한 보호망을 만들어 여성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좋은 여성은 남편이나 애인에게 떠받들어져야 한다”라는 등의 격언으로 여성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여성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온정적 성차별은 겉으로만 “좋은 여성”이라는 유인을 부여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동시에 여성을 남성의 보호를 받는 약자로 치환함으로써 여성의 힘과 능력이 과소평가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앤더슨은 여성을 위한 존중이 가장된 것임을 지적하고, 그 이면에 나약한 여성과 강인한 남성이라는 차별적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앤더슨은 온정적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여성이 잠시라도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날 경우, 다시금 적대적 성차별의 위험에 노출된다고 설명한다. 조신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여자답지 못하다’라는 핀잔을 들을 수 있듯이 말이다. 앤더슨은 이처럼 적대적 성차별과 온정적 성차별이 우리 사회에 양립하고 있어, 번갈아 가면서 여성을 지배한다고 분석한다.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종식됐다며 페미니즘의 존재를 매도하는 안티 페미니즘의 주장은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젠더 전쟁의 불식을 위해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젠더 전쟁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불식시키기 위한 담론이다.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배척하고 여성의 이익만을 위하는 사람이라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세간의 편견과 달리 진정한 페미니즘의 이념은 남성을 여성과 동등한 주체로 바라본다. 앤더슨은 페미니스트가 성차별의 원인을 남성이 아닌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젠더 불평등’에서 찾고자 함을 역설한다. 젠더 불평등은 성별에 따라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원치 않은 일을 억지로 수행해야 하는 등의 불이익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젠더 불평등은 남녀노소 겪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육체노동이 당연하게 부과되는 것을 숱하게 봐 왔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외모 관리가 강요되는 것도 자주 봐 왔다. 때문에 젠더 불평등에 대한 페미니즘의 증오는 결코 남성에 대한 증오와 같지 않다. 윌리엄스와 앤더슨이 해명했듯이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젠더 불평등이 성별에 고유한 역할과 고정관념을 부여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임을 밝힌다. 그러므로 여성과 남성은 모두 전통적인 성 역할과 고정관념에 얽매인, 젠더 불평등의 피해자다. 두 저자는 그렇기에 우리가 페미니즘을 더더욱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에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담론이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등장한 지는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지적하는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모순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는 구체적인 영역 내에서 앞으로 더 고민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주된 관심사가 젠더 전쟁이 아니라 젠더 불평등의 종식에 있음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성별 싸움을 조장하지 않고 오히려 연대의 감정을 싹틔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수확이다.

우리는 어느덧 젠더 전쟁에 익숙해졌다. 서로가 자신의 성별에 대한 “일반화를 하지 말라”라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면서도, 정작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그와 같은 일반화를 동원하며 상대방에게 책임 소재를 전가하려고 한다. 이런 탓에 오늘날 페미니즘 논쟁은 성차별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부과해야 하는지 합의하지 못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할 때가 많다. 

윌리엄스와 앤더슨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젠더 전쟁 속에서 화해할 수 없는 주체가 돼 버린 ‘남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이기기 위한 평등이 아니다. 우리에겐 페미니즘을 전쟁의 발원지가 아닌, 젠더 전쟁을 불식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할 좋은 선입견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전쟁이 아니다 Women vs. Feminism (조안나 윌리엄스, 유나영 옮김, 424쪽, 별글, 2019.10)
여성혐오의 시대 Modern Misogyny: Anti-Feminism in a Post-Feminist Era (크리스틴 J. 앤더슨, 김청아, 이덕균 옮김, 344쪽, 나름북스, 2019.10)

 

 

 

 

 

 

 

 

 

 

여성혐오의 시대 Modern Misogyny: Anti-Feminism in a Post-Feminist Era (크리스틴 J. 앤더슨, 김청아, 이덕균 옮김, 344쪽, 나름북스, 2019.10)
페미니즘은 전쟁이 아니다 Women vs. Feminism (조안나 윌리엄스, 유나영 옮김, 424쪽, 별글, 2019.10)

 

 

 

 

 

 

 

 

 

 

삽화: 김지온 기자 kion2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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