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경(법학전문대학원 석사과정)
박재경(법학전문대학원 석사과정)

독일 판례를 보다 보면 관할 법원명 바로 밑에 항상 오는 문구가 하나 있다. 바로 “국민의 이름으로(Im Namen des Volkes)”이다. 비슷하게 프랑스도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au nom du peuple français)”라는 엄숙한 선언으로 판결서가 시작된다. 이처럼 대륙법계 국가들은 보통 자국 주권자의 이름으로 판결을 선고한다. 스페인은 “국왕의 이름으로”, 룩셈부르크는 “대공의 이름으로”, 바티칸은 “주님의 이름으로” 판결을 선고하는 식이다.

반면 우리나라나 일본 판결서에는 이러한 서두가 없다. 판결은 국민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소송법 조문도 없다. 과거 2006년,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이 신임 법관 임용식 훈시에서 “재판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판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을 뿐이다. 당시 이 전 대법원장이 “국민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을 강조한 부분과 맞물려 해당 발언은 재판 포퓰리즘 논란을 일으켰다. 헌법 제103조 소정의 “법관의 독립”은 권력뿐 아니라 국민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서 사법권의 지위는 어정쩡하다. 입법부는 국민의 투표에 의해 구성된다. 행정부는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수반이 관료를 통솔한다. 반면 사법부는 그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 그나마 대법원장과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있다. 반면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일반 법관이나, 헌법재판관 9인 중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은 국회 동의조차 요하지 않아 “간접간접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다는 ‘웃픈(?)’ 주장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법관의 독립과 국민주권주의라는 두 지고의 가치를 어떻게 형량(衡量)해야 할지는 모든 민주국가의 공통된 고민이다. 이는 특히 법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대륙법계에서 문제가 된다. 독일·프랑스·일본 등은 특정 형사재판에서 참심제를 도입해 일반 시민이 법관과 동일한 자격에서 합의체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일부 형사재판에 한해 배심제와 참심제를 혼합한 국민참여재판 제도를 시행 중인데, 배심원의 평결은 원칙적으로 법원을 기속하지 않지만, 사실상의 기속력은 점차 인정되는 추세이다(大判 2009도14065).

그러나 주권자인 국민은 아직 목이 마르다. “판새”는 왜 항상 강자, 부자의 손을 들어주고, “개검”은 왜 저런 놈에 대해 저 정도밖에 구형을 하지 않는 것이며, “돈에 미친 변호사”의 양심은 안녕들 하신가? 청와대 국민청원의 상당수가 법원의 판결이나 수사기관의 수사, 법 개정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와 같은 분노의 단편적 표출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일 뿐이다. 모든 재판은 국민이 제정한 헌법과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제정한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서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법률의 언어를 발언하는 입, 그 힘이나 엄격성을 완화할 수 없는 무생물”에 불과한 법관이, 부당한 법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위헌법률심판제청뿐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나라의 위헌결정 수는 질 낮은 입법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따라서 판결이나 법률이 부정의하다고 느낄 때에는 사법부나 행정부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입법부에 항의를 해야 한다. 국민들의 주장 중에는 법률에 반영할 만한 내용들이 분명 존재한다. 심신미약의 필요적 감경을 규정하던 형법 제10조 제2항을 임의적 감경으로 개정한 이른바 ‘김성수법’도 시작은 국민청원이었다.

하지만 항의나 청원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목청을 드높여봤자 여야 합작의 ‘식물국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시로 피상속인에 대한 보호·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부모나 자식의 경우를 민법상 상속결격사유로 추가하자는 이른바 ‘구하라법’은 국회 청원으로 시작돼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돼 있지만, 다음 달 20대 국회의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운명에 처해 있다. 백날 시민사회와 학계, 업계가 합심해서 주장을 펼쳐도 국회의 구성원이 불변하는 한 이런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막을 내렸다. 고등학교 2학년들이 매년 “올해 신입생들이 최악이다”라고 분개하는 것처럼, “이번 국회는 최악의 국회”라는 말도 습관이 됐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최악의 국회를 구성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 제발, 나의 표가 4년 전보다는 더 “가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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