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 선임연구원(인문학연구원)
김기훈 선임연구원(인문학연구원)

“나는 과제한다. 코로나는 존재한다.” 비대면 강의를 통해서 최근에 접하게 된 우스갯소리이다. 이 짤막한 패러디는, 온라인 강의 기간 확대로 인해 오히려(편집부의 검열 아님) 늘어난 과제 분량을 겨냥한다. 화자는 아마도 지금-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대학생일 것이다. 국가 차원의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연장되면서, 한시적인 조치로 예상됐던 비대면 수업 역시 좀 더 길어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학생들의 일상에서 과제가 차지하는 비중도 당분간은 줄어들지 않을 모양이다.

“cogito, ergo sum.”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라틴어 문구 중 하나일 것 같다. 이번 학기 <라틴어 1> 수업에서 얼마 전에 필자와 함께하는 수강생들은 이 짧은 표현이 어떻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번역되는지 익힌 바 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남긴 이 너무나도 진지한 한마디를, 자조적으로 희문(戲文)한 ‘과제하는’ 학생들의 재치가 반갑고도 참신하다. 그 옛날 ‘봄은 왔건만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라는 시구가 학생들에게는 새삼 더 와닿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봄은 또 왔고, 잠시 머물다 슬며시 질 것만 같다.

초유의 사태로 인해 봄학기 개강도 연기됐고, 대면 강의를 통해 학생들과 마주하게 될 날은 아직 가깝지 않아 보인다. 필자 역시 매주 실시간 화상 강의를 통해 수강생과 수업을 이어오고 있다. 수강생의 절반은 2020년에 입학한 신입생인데, 공식적으로 등교가 연기된 상황에서 맞게 된 이 봄이 이들에겐 특히나 더 답답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시절로 기억될 것 같다. 그럼에도 늘 진지하고 열성적인 모습으로 온라인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흐뭇할 따름이다. 아직 이번 학기 수업 시간에 다루지 않은 표현이지만, 지면을 빌려 필자의 <라틴어 1> 수강생들과 학내 구성원들께 짤막한 라틴어 문구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festina lente!” 이는 기원전 1세기 말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을 종식하고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를 열었던 아우구스투스가 즐겨 쓴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이를 그리스어 ‘σπεῦδε βραδέως’(「아우구스투스」 25.4)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말의 라틴어 번역인 ‘festina lente’가 더 널리 회자된다. 뜻을 새기면,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명령문이 되는데, 두 단어가 상반된 뜻을 담고 있어서 형용모순의 사례로 자주 제시되는 문구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경구를 자주 입에 담았던 건 전쟁이나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를 염두에 두고서였다. 전시 상황이나 위기 시에 지도자는 신속함과 신중함을 겸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로마 제국 초기의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티투스 황제 역시 ‘festina lente’를 중요시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기원후 79년 여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라는 자연재해 이후의 난국을 그가 조기에 안정적으로 수습한 것도 어쩌면 그러한 모토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로마 황제를 거론하면서 훗날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격언집』에서 이 금언을 풀이한 바 있는데, 독자에게 그가 함께 기억하라고 당부하는 상징이 있다. 커다란 ‘닻’을 날랜 ‘돌고래’가 휘감아 도는 형태의 문장(紋章)이다. 때로는 달팽이껍질을 지고 있는 토끼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말이 또한 ‘천천히 서둘러라’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다. 차츰 상황이 나아지는 듯하지만, 아직은 한결 조심스러운 무렵이다. 신속한 초기 대응과 면밀한 방역을 통해 위기와 불안을 극복해낸 우리의 국가 공동체가 호평을 받고 있듯이, 저마다 낯선 불편함을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 본교에서도 큰 잡음 없이 비대면 강의 기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기한이 확정되지 않은 현재로서는 앞으로 구성원 각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당연히 많이 남아 있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인생이라는 여정의 과제는 불확실성을 지워나가는 것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 어려운 시절을 살아내며, 이제 갓 성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신입생을 비롯해 학내 구성원 모두가 아무쪼록 다시 순항할 수 있기를... festina l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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