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와 4.19 혁명
서울대와 4.19 혁명
  • 대학신문
  • 승인 2020.04.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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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광 전 명지대 교수

4.19 당시 나는 3학년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 (지금의 학생회) 부위원장 겸 총학생회 수석 부위원장장직을 맡고 있었다. 큰 사업가시던  할아버님께서 심장마비로 급서하시어 가업을 잇느라 법관의 꿈을 접었던 아버님의 강권에 못 이겨 나는 1960년 3월초까지 경상북도 희방사에서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생회 일로 잠시 하산하여 서울로 돌아와 있다가 3.15 부정선거를 맞았다. 결국 4.19 서울대 데모 사전조직에 가담하게 되었고 판사가 되기를 희망하셨던 아버님의 꿈도 4.19의  격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물론 나로서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각설하고 서울대 사전모의와 4.19 당일 교수단 데모에의 참여과정, 그리고 그 직후 소위 대책회의 활동을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고 아직도 당시의 동지들과의 고증도 거치지 않아서 불완전하고 미비할 수밖에 없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일들만 소개코자 한다. 이 기사를 계기로 옛 동지들과 협의하여 서울대만이라도 실록을 만들어서 보다 정확한 기록을 후대에 남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마산사태가 발생한 다음날인가 김성희교수 정당론 강의가 끝난 후 반우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정치학과 연구실에 모여 3.15 부정  선거와 마산 사태와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렸다. 

당시 정치과 과회장이었던 윤식이 주재를 했다. 여기서 마산으로 조사단을 보내자는 안 (정종문 제안) 에서부터 거리로 나가 투쟁을 하자는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시간이 늦어져 남산 필동에 소재한 아버님 소유 빈집 (필동 2가 3번지, 이곳이 그 후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으로 장소를 옮겨 밤늦께 까지 상의를 한 끝에 서울의 각 대학들과 연계하여 대규모 항의 데모를 벌이기로 결론을 냈다.

다음 날로 기억되는데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더 규합하여 40명이 필동 집에 다시 모였다.  이때는 정치과 동기는 물론 정치과 외교과 2학년 그리고 타과 학생들이 다수 참여하게 되는데 면면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정치외교과 3학년으로는 윤식, 유세희, 노건일, 이수정, 황선필, 정종문, 오동휘, 김구, 이장춘, 김홍준, 이영일, 박실, 양성철, 박운서 등, 2학년으로는 최인환, 이청수, 김영작, 이동화, 공선섭 등 (최종명단은 차후 다른 기회에 밝힐 것이다).  타과 학생으로는 중문과의 권혁조, 사학과의 노흥권, 철학과의 서정복(격문 작성자),  독문과의 송재곤, 언어과의, 김인수(2학년) 국문과의 김석산, 사회학과의 이충호, 이강준 등등 정확히 40명이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의 행태로 보아 한 번의 데모로는 별무효과라고 판단하고 장기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서 나온 안이 파상적 데모 공세 전략이었다.

40명을 5인1조로 편성하여 각조마다 조장을 두고 우선 1조가 책임을 지고, 퇴학은 물론 모든 형사적 책임을 지고 교도소를 가고, 그 다음으로 2조가 책임을 지고 2차 데모로 이어 가서 총 8번의 데모로 장기전으로 돌입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5인조 조직이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누군가가 제안을 하길 3.15 부정선거에서 자유당이 5인1조로 당원을 조직해서 부정선거를 했으니 그 수법을 돌려주는 의미에서 우리도 5인조 하자는 것이었다.  즉각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40명을 8조로 나누고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각 조마다 고유의 임무를 분배하였다. 우선 1조는 총괄조로하고 윤식, 김홍준, 정종문, 김광 외 1 인으로 배정되고 조장은 김광이 맡기로 합의가 되고, 2조는 노건일이 조장으로 박실, 이청수 (해당 조는 아니었는데 몆가지 좋은 구호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내가 강력히 추천하여 채택이 된 기억을 갖고 있다) 등이 동원을 맡고, 3조는 유세희가 조장을 맡고 이수정, 황선필 등이 선언문을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 조에서는 활발한 자체 토론을 거쳐 이수정이 취합 대표 집필을 하고 명필로 소문이 나있던 황선필이 썼다. 다음 조는 구호와 결의문 격문 등을 만들고, 이영일이 또 한 조를 맡아 프라카트와 유인물 인쇄를 맡고, 나머지 조들은 조직과 연락 등을 맡는 등 업무분장을 마치고, 그러한 우리의 결의를 담보하기 위하여 연판장을 작성 각자가 서명 날인을 하고, 내가 직접 권혁조에게 보관토록 하였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이 역사적 서류를 권헉조군이 분실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고 만다).  거사일은 4월 21일로 정해졌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 갈 것은 그 당시 타 대학교와는 달리 왜 서울대에서는 4학년이 아니고 3학년과 2학년이 주동이 되었느냐 하는 의문이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이제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1959년 경 부터 자유당은 마지막 발악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정재의 조직깡패들을 끌어드리면서 대학사회에 까지 손을 뻗쳐 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유당을 지지하는 전국 구국 학생총연합회의 출현이다. 나보다 2년 윗반으로 경기고 출신으로 상과대를 다니면서 4학년 때 총학생위원장을 지낸 김인학이란 인물이 있었다. 내가 갓 입학해서 부터 박하용 (역시 경기고 졸업)을 통해 알고 지냈는데 나에게는 참 잘해 주던 선배였다.  총위원장 일도 잘 하고 인물, 체격도 좋아서 나름 인기가 있었는데, 졸업 무렵 문제가 생기기 시작됐다. 그의 아버님이 자유당 정권의 장관으로 취임을 한 것이다. 그 후 그의 아버님 지시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독자적 판단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하여튼 그가 중심이 되어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구국학생 총연맹을 결성하게 되면서 박하용 (당시 서울대 총학생위원장)을 필두로 여러 단과대 위원장들이 여기에 가세하였다.   나에게도 총무부장 직을 제의하면서 압박을 해왔다. 박하용과 나는 1년 차이가 있었지만  입학과 동시에 친구가 되어 상당히 가싸운 사이였다. 당시 나는 간이 좀 부어 있던 상태라서 2학년 말에 3학년을 제치고 위원장 출마를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자기는 기회가 영영 없어지게 되니 요새 말로 한번 만 봐주라는 박하용의 설득과 주변 친구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내가 양보(?)를 해서 그가 위원장 내가 부위원장으로 출마를 해서 당선이 되었다. 그런 그가 나를 압박을 해오니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고 나아가서 그들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서울 각지에 상당히 많은 여러 종류의 친구들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여타 단과대학 간부 (4학년) 들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고, 다만 사회학과 4학년이었던 안병규 (과회장이었던 것으로 기억 됨)과는 단 둘이 문리대 교정 잔디밭에서 만나 우리의 거사계획을 설명하고 참여해 줄 것을 제의한 바는 있다. 그러나 안병규는 "미안하지만 동참을 할 수 없다" 고 딱 부러지게 답변을 해왔다. 3학년이 주도한다는 것이 걸렸는지, 또는 특별한 집안 사정이 있었는지는 나로서는 짐작키 어려웠다. 그 후 우리는 4학년들과는 접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4학년 학생들이 사전 조직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 4학년 학생들이 그 후 4.19의거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단코 아니라는 점을 거듭 밝혀둔다.  오히려 우리들의 노력이 부족 했었을 수도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4.19 당일 우리 문리대 캠퍼스에서는 전원이,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다 같이 한마음 한 몸으로 동시에 우리의 혁명대열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강조해 천명하고져 한다. 

각 조의 동지들이 열심히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4.18 고대학생 피습사건!  너무 잘 알려진 사건이기에 지면 제약상 구체적 언급은 생략하겠다.  사실은 우리는 고려대 학생회와 사전연락을 해서 공동보조를 맞추는 임무를 위해 고대  법대의 최완준과 상대의 장영백을 일찍 부터 조원으로 참여 시키고 있었다.   (이 둘은 나와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중 최완준은 성격이 매우 치밀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는데 기밀누설을 우려해서 최종 순간까지 기다리다 결국 실기를 한 꼴이 되었다. 그려나 돌이켜 보면 4.18 고대피습사건이 있었기에 4.19가 더욱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 모든 겻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여하튼 문제는 터졌고 우리는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계획이 4월 21일로 맞추어져 있었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긴급히 연락을 취하여 (오후 3, 4시 경으로 기억된다) 서울대 의대 뒷동산 함춘원에서 약 20여명의 동지들이 긴급회합을 갖고 오늘 벌어진 고대사건의 파장을 분석하고 우리의 4.21 거사의 관철여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함춘원은 아주 완만한 경사의 산기슭이었는데 동지들은 몇 횡 대열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맨 앞 제일 낮은 위치에서 친구들을 올려다보는 상태에서 사회를 보았기 때문에 각자의 표정을 잘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흥분한 상태에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이 모임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전원이 발언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몇몇은 사양을 했고 그러나 대다수가 각자의 소신을 밝혔다. 

격론 끝에 3가지 안으로 압축되었는데 그 첫째가 거사일을 4월 21일에서 25일 또는 26일로 연기하는 안, 둘째는 거사를 아예 무기 연기하고 사태를  관망해 보자는 안, 그리고 셋째는 고대 피습사건으로 인해  학원가는 물론 전 국민의 공분이 일고 있는 현 상황을 이용, 거사일을 오히려 앞당겨 내일 즉  4.19일 아침으로 하자는 안이 그 셋째이었다. 또 한 차례의 격론 끝에 제 3안 즉 4.19일로 거사가 확정되었다.

이미 전 경찰이 비상사태에 돌입한 상황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동숭동 캠퍼스 (지금의 대학가)의 위치였다. 우리의 목표는 국회의사당 (현 서울시의회)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종로까지는 무조건 진출을 해야 한다. 만약 경찰이 종로 5가 쪽과 원남동 로터리 그리고 혜화동 로터리를 트럭으로 봉쇄하고 바리케이드를 친다면 우리는 완전히 독안의 든 쥐와 같은 상황이 될 것이다. 함춘원 회의를 마친 후  몇몇이 따로 대학다방에서 구수회의를 가졌다. 우선 서울 시내 경찰의 병력수를 알아보기로 했다.  파출소 요원까지 합쳐서 약 7,000명 정도로 추산이 나왔다. 시경으로는 파출소를 다 비울 수는 없을 테고, 전일 고대 사건으로 19일에는 고대를 비롯하여 주요대학에 소요가 날 것을 우려해 그쪽으로도 소규모라도 병력을 배치 할 것이니 병력이 많이 분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결론은 의정부, 수원, 인천 등지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 까지는 동대문경찰서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삼국지> <열국지>를 탐독하던 시절 이어서인지 그럴싸한 계책이 하나 나왔다.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역정보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경찰은 이미 며칠 전 부터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나는 이틀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당동 백낙환 매부 (전 인제대학 이사장, 작고, 우리에게 많은 용기를 주시던 분이다) 집에서 잤다.  어차피 경찰에서는 19일에는 서울대에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을 터이니, 차라리  내일 서울대에서 데모가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흘리자는 것이다. 흘리되 시간을 오전 11시로 알려 주자.  11시라면 경찰 쪽에서도 그렬싸 하다고 판단 할 것 같았다. 등교시간, 준비시간, 동원시간 등등을 계산하면 대략 맞는 수치가 아니겠는가!  자, 그런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내 바로 앞에 김홍준이 앉아 있었는데 이 친구는 평소부터 행적이 좀 신비스러운 면이 있었다. (후일 국정원 간부로 황장엽 선생을 탈출시켜 한국으로 데려옴).   당시 담당 형사들과 안면을 많이 트고 지냈다. 자연스럽게 홍준이가 맡기로 하고 즉각 실행에 옮겨졌다.  만약 경찰이 우리의 미끼를 물어만 준다면, 경찰이 오전 11시에 맞추어 병력 동원 계획을 짜준다면 우리는 9시 늦어도 9시 30분 까지는 교정을 나올 테니까!  누가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 이라 했다지?".  나도 이젠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여기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어제의 고대 피습사건을 이미 본 터라 우리 서울대생의 전투력이 좀 걱정이 되었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장영백 (고대 상과 대학)과 정용택 (경희대학)을 이들과 특히 친하게 지내던 권혁조에게 급히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했다. 이미 우리의 사전조직에 들어와 있던 장영백은 유도 공인 5단으로 유도 계에서는 날리던 인물이고  경희대의 정용택 역시 사이클과 빙상 국가대표선수로 당시  육군 HID소속 상사로 상당한 전투력의 소지자였다. 장영백에게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유도대학 학생, 그리고 정용택에게는 평소 가깝게 지내는 동생들 몇을 동원해 보라고 부탁을 했다. 이들은 실제로 4월 19일 아침 각자 7-8명의 의인들을 데리고 나타나 많은 활약을 했다.

4 19 당일.

전날 밤을 정종문, 권혁조 등과 함께 필동 아지트에서 거의 밤샘을 하고 새벽 5시경, 종로 5가 평화극장 뒷골목에서 해장국으로 요기를 하고 동숭동 교정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었는데 전날 고대사건 이 궁금한 학생들이 일찍 부터 속속 모여들어 8시 30분 정도 되니 정확한 수자는 모르겠으나 6-70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계획대로 제 2조는 동쪽 강의실, 3조는 서편 강의실을 맡고 또 다른 조들은 미대 , 법대, 음대와 의대 등으로 뛰어가 학생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후에 생각하니 수의대에는 선동조들이 가지 않았고, 법대와 의대생들은 호응도가 좀 낮았다.  이런 와중에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형님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는 식의 외침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직접 듣지는 못했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물론 동숭고 학생들은 우리계획이나 현재 우리교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빨리 데모에 나서 달라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9시가 좀 지나면서 모두가 흥분한 상태가 되어 문리대 본관에서 부터  정문까지 대오를 갖추고 진군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이양하 학장님이 나타나셔서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 앞을 막고 서시는 것이다( 정문은 이미 학장님의 지시로 수위들이 걸어 닫았다가  학생들이 거칠게 항의를 해서 9시 20분경에는 문을 다시 열은 상태였다).  영문학자로서의 명망은 말 할 것도 없고 조용한 성품에 참으로 인자하셨던 분이어서 그를 존경하지 않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들 지금 나가면 크게 다치게 되네!" 뒤쪽에서는 이 상황을 모른 채 밀고 나오고 있었고, 우리는 어떻게 하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종로 5가 까지는 도착하여야 하는데, 그래도 나는 가급적 조용히 말씀을 드렸다 (이양하학장님은 말썽꾸러기였던 나를 항상 비호해 주셨고 훗날 졸업 때는 공로상이란 것도 주셨다).  "선생님, 제발 좀 비켜주세요. 정말 시간이 없읍니다".  두 번 세 번 말씀을 드렸으나 선생님은 여전히 두 팔을 벌린 채 요지부동이셨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비켜".  돌변한 나의 태도에 깜작 놀라시며 튕기듯 옆으로 비켜나시었다. 죄송하다는 말씀 한마디도 못 드린 채 우리는 교정을 나섰다. 오동휘와 또 한 친구가 든 큰 프라카드를 앞세우고...  

종로 방향으로 한 200 미터 쯤 나아갔는데 경찰들이 이미 대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후미 대열을 정리하고 앞으로 뛰어와 선두에 막 합류하는데 몇몇은 벌써 경찰과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의 자세가 좀 이상했다.  횡대로 6-7열이 대로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양손을 아래로 내린 자세로 경찰봉을 맞잡고 옆의 사람과 어깨가 맞대게,  밀착한 상태로 서 있었다. 여기서 내가 놓친 몇 십초 중요한 상황이 있어 노흥권 (처음부터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 앞까지 가장 선두에 서서 싸운 인물로 세계적 권위 잡지인 미국의 Life 지의 표지 전면 사진을 장식한 인물임. 미국 대통령도 한번 전면표지를 장식하기가 쉽지 않은 일)의 진술을 토대로 인용 소개를 해야겠다. 데모대가 경찰과 약 5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한 순간 갑자지 모든 동작이 멈춘 상태에서 십여 초 간 침묵 흘렀다고 한다.  학생, 경찰 모두가 좀 겁에 질렸다 할까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부 학생들이 주저앉아 연좌데모로 들어가려 했단다. 만약 그 당시 모두가 주저앉아 연좌데모로 들어갔다면 아마도 4.19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4.19가 커진 것은 그날 서울대 학생들이 경찰에게 폭행을 당한다는 뉴스가 퍼져 나가면서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뛰쳐나오고 시민들이 흥분해서 합세하면서 판이 커졌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랑 같지만 사실 타 대학들은 약간의 마찰은 있었으나 경찰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국회까지 진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동숭동에서 출발한 서울대 팀은 수의과 대학 앞 전투로 시작해서 동대문 경찰서 (지금의 혜화경찰서) 앞 전투 (가장 치열했던 전투) 그리고 경찰이 최초로 최루탄을 발사한 파고다공원 앞 전투를 치르면서 의사당까지 진출에 성공을 했다                                                                              

여하튼 내가 선두에 도착했을 순간에는 연좌 데모파를 무시하고 노흥권을 위시해서 몇몇이 선봉에 서고 선두에 있던 동지들이 경찰들에 달려들기 시작할 때였다. 나도 그대로 이들과 함께 경찰저지선에 부딪쳐 갔다. 그 순간 그들의 자세로 보아 나는 얼핏 생각하기를 저들이 경찰봉을 갖고 ‘우리를 밀어 내려고 하는구나!' 라고 판단을 하고,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보였기에 우리가 간단히 밀어 제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웬걸, 그들과 부딪치는 순간 이들은 옆으로 잡고 있던 경찰봉을 위로 쳐들더니 사정없이 내려치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우리는 평화적 시위를 생각했지 요즘 같은 전투적인 데모는 상상도 못하였다.  무수히 얻어 맞고 우리는 공업연구소와 대학 다방 앞까지 일단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들은 추격해 오지는 않았다. 유세희 등 몇몇 친구들은 머리가 깨졌고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권혁조가 유세희를 부축해 병원으로 갔다. 너무 분해서 씩씩 거리고 있는데 무개 경찰 백차를 탄 동대문서 경비과장이 차를 몰아 앞으로 나오더니 메가폰을 잡고 내 이름을 불러 대는 것이다. 나와서 협상을 하자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고,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비겁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그들의 차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갑자기 4, 5명의 무술경관들이 달려들어 나의 사지를 하나씩 잡고 들어 올려 차에 태우려는 것이 아닌가. 나도 힘깨나 쓴다고 할 때였다. 반항을 하고 있는데 정남을 필두로 외교과 2학년 친구들이 달려 나와 육박전을 한 후에야 겨우 풀려났다.   다시 대치 상황. 

그런데, 갑자기 경찰대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군이 당도한 것이다. 당시 공업연구소가 개천 왼쪽에 있고 그 뒤쪽으로 법대와 미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길 오른편에는 수의대의 낮은 담장이 있었는데 우리가 경찰에 맞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처음에는 미온적이었던 법대, 미대 그리고 수의대 생들이 몰려 나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순간이  아마도 현대 시위문화를 특징짓는 투석전의 효시라 할 것이다. 당시 수의대에는 건물 공사를 하고 있어서 자갈이 많이 쌓여 있어서 탄약이 충분 했고, 법대 측에는 돌멩이가 떨어지자 담을 허물어 벽돌 조각들을 던졌다.  전날 밤 우리가 준 역정보가 효과를 본 탓인지 그때의 경찰병력은 2개 중대 정도로 150 내지200명이 넘지 않았다.  동대문서에서 요청한 지원 병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경찰의 대오가 무너지면서 우리들은 돌진했다. 법대, 미대, 수의대생들 까지 가세하여 우리의 병력은 크게 증강되고 사기가 올랐다. 그래도 경찰과의 충돌은 계속 되면서 우리의 대오도 둘로 갈라지게 된다. 나를 포함한 일대는 원남동 로터리로, 윤식등 다른 일대는 종로 5가 쪽으로 진출하게 된다. 경찰은 자기들의 저지선이 무너지자 동대문서로 철수를 한것 같았다.     

내 쪽의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우리는 원남동 로터리를 돌아 동대문 경찰서 (지금의 혜화 경찰서) 앞까지는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종로 4가 가까이 가니 이곳에는 동숭동 때 보다 훨씬 많은 경찰들이 진을 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원 병력이 도착했나보다.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동숭동전투에서는 경찰이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가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대문경찰서 앞 전투에서는 데모대가 가까이 접근을 하자 경찰 측에서 우리를 먼저 공격을 해 왔다. 완전히 혼전상태였다. 초기에는 우리가 완전 열세 이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종로 5가 쪽으로 진출한 우리 데모대가 도착하면서 경찰은 두개의 전선에서 싸울 수 밖에 없게 되고 (경찰이 샌드위치 형국이 되었음) 결국 우리는 저지선을 뚤코 종로 3가 쪽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동숭동 전투보다 여기서 더 많은 부상자가 나왔고 윤식 등 여러 친구들이 체포, 연행되었다.   내 경우는 경찰 3,4명이 합세하여  곤봉으로 내려치는데 너무 다급해서 도망을 가야겠는데,  얼핏 보니 동대문서 바로 건너편에 전매청(구) 건물 마당이 훤하게 비어있는 것이 보였다.   무조건 그리로 뛰는데 이들은 나를 체포하는 것이 목적인듯 악착같이 쫒아 오는 것이 아닌가! 무작정 뛰다 보니 막다른 골목 우측에 돌 축대가 있고 그 위로 콘크리트 담장이 있는데 그 높이가 까맣게 보였다.  죽을힘을 다하여 몸을 날려 축대를 차고 계속해서 담장을 뛰어 넘었다 (후일 현장을 찾아 가보니 축대가 2미터, 콘크리트 담장 합쳐 약 4 미터 정도였다). 경찰들은 포기를 한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원예식장 정원이었고, 다시 예식장 후면 담을 넘으니 종묘 뒷골목이었다. 정신을 차려 생각을 해 보니 큰 일이 났다. 아침에 유세희인가 이수정인가가 나에게 넘겨준 선언문과 결의문이 내 품에 있지 않은가!  오늘의 거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 중 하나인데, 나는 본대와 완전히 떨어져 있고 시위대는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다시 원남동으로 가서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다시 뛰기 시작해서 원남동 로터리에 당도해 보니 데모의 흔적도 없이 조용했다. 마침 시발택시 한대가 오는 것이 보여 무작정 차도로 뛰어들어 차를 세웠다. 기사 보고 종로 3가 쪽으로 가자고 하니 데모 때문에 못 가겠다고 망설이는 그에게 내가 바로 데모 학생인데 이런 저런 사유로 그곳으로 꼭 가야한다고 하자 흔쾌히 단성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릴 때  택시비도 받지를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기사님이었다. 데모대는 그때는 이미 종로 2가를 지나 1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또 뛰었다  파고다공원 옆 파출소는 이미 파괴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날 데모대가 벌인 최초의 폭력행사이었을 것이다. 평화적 시위대가 얻어맞고 또 맞다 보니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때에는 벌써 학생들 이외에 과격한 시민들이 상당수 가세한 상태였다. 여기가 세 번째 전투였는데 좀 중요한 의미가 있어 그때 상황을 노흥권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을 해 보겠다. 데모대가 파고다 공원에 가까이 이르러 보니 또 다른 경찰대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을 쏴 대기시작 했다. 그래도 선두 학생들은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뒤쪽의 학생들은 돌을 던졌다. 문제는  돌들이 경찰위로 떨어진 것도 많았지만 우리 편 최선두의 머리 위로도 떨어졌다. 견디다  못해 노흥권을 비롯해서 제일 앞 몇 줄에 있던 친구들은 국일관 골목 쪽으로 빠져나가 을지로 노선을 따라 시청을 지나 의사당으로 갔다. 이 그룹이 제일 먼저 의사당에 도착을 했다. 일단 선두그룹이 빠지니 거리가 생겨 데모대는 마음껏 돌을 던졌다. 모자라는 돌은 시민들 특히 아줌마들이 날라다 주었단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합류를 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쏟아지는 돌팔매에 3차 저지선이 무너지고 본대는 거침없이 진군을 했다. 나는 광화문 4거리 좀 못 미쳐서야 선두에 다시 설수 있었다. 

그런데 골칫거리가 생겼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박하용이 튀어들더니 " 야, 광이야, 나도 좀 끼워줘."  내가 미쳐 대답을 할 사이도 없이 내 옆에 딱 붙어서는 것이다. 국회의사당 건물에 접근하고 있던 터라 그에게 신경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나 좀 불길한 생각은 들었다.  ‘이애 때문에 오늘 무슨 사단이 나겠구나!'.    

드디어 목적지인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장내를 좀 정리하고 의사당 계단 상단 왼편 해태상이 있는 좌석에 약간의 공간이 있어 그곳을 포디움(podium)으로 사용하면서 사회 진행을 했는데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할 차례가 됐다. 이 순간 나는 망설였다. 내가 1조의 조장으로 문서를 받긴 했는데 딱히 누가 낭독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친구들과 사전에 결정을 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옆에서 친구들이 재촉을 해서 하는 수 없이 선언문을 꺼내 들었는데 문제의 박하용이 또 나섰다 "야, 내가 아직 총학생위원장인데 내가 읽을게" 하면서 내 손에 있던 선언문을 낚아채듯이 가져가는 것이다. ‘아이쿠, 큰일이 났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경수 (박하용의 경기고 1년 후배로 축구 선수였는데 성격이 급한 친구 이었음)가 두말 안하고 두발장구로 박하용의 등을 차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다. 박하용은 물론 연단 밑으로 떨어지고 밑에 있던 구국학생 총연합회에 반감을 갖고 있던 학생들이 쓰러진 그를 마구 밟기 시작 했다. 사람 죽이게 생겼다 싶어 얼른 뛰어 내려 뜯어 말리고, 김석산에게  그를 장 밖으로 안전하게 피신을 시키라고 하고 나니 선언문을 읽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한때 가까운 친구였는데..

그러면 누구로 하지?  그때,  미대의 이성미가 눈에 띄었다. 어제까지도 데모는 안하겠다던 사람이 (나중에 경무대 앞까지 쳐들어 같다) 놀라왔다. ‘그래, 선언문은 사전조직 팀이 아닌 여학생으로 하자’.  옆에서도 반대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문리대 여학생들이 즉각 반발을 하고 나섰다.  "아니, 일은 문리대 남학생들이 했는데 왜 미대 여학생이냐?" 여학생이라면 당연히 문리대 여학생이어야 한다고 항의를 해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야, 저기 법대 여학생도 나왔네" 법대의 홍일점 손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손양을 불렀다. 결국 역사적 4.19 선언문은 손양이 읽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손양을 다시 본 일이 없고 사실 이름도 모른다.

선언문, 결의문 낭독 까지 마치고는 자연스럽게 다음 행보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우선 대법원장에게 대표를 파견하자는 안이 나와 오동휘와 최인환 외 1인을 대표로 보내기로 하고, 여러 가지 안을 놓고 토론이 계속 되는데 이때는 이미 타 대학 으로는 동국대가 도착을 하고 있었다. 중앙대, 숭실대, 정치대 등등, 연대, 이대, 중앙대, 숭실대 정치대 등은 나중에 도착을 했거나 경무대 앞으로 집결을 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동국대 학생들이 우리 뒤로 도착을 하면서 서울대생들을 둘러 싼 형국이었는데 나중에 경무대로 행진을 할 때는 "뒤로 돌아, 앞으로 가" 식으로 진행이 되어 이번에는 동국대가 선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경무대로 가는 동안 데모 대원들은 학교에 관계없이 뒤섞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래도 경무대 앞에 도착했을 당시 서울대와 동국대생들 다수가 앞쪽에 포진이 되고 그래서 그날 희생자 가운데 서울대와 동국대생들이 가장 많이 포함 된 것이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 가 보면 여러 의견들이 나왔다.  제일의 토론주제는 구속학생들의 석방문제였다. 경찰청으로 가자, 대법원으로 가자, 그리고 경무대로 가자, 심지어는 어제 고대사건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자 등등.  나는 여기서  정치과 이동복 선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복씨는 재학생신분으로 일찍이 한국일보 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이날 보도차량 한대를 갖고 나와서  종로에서 부터 데모대를 엄호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었다. 누가 와서 이선배가 나를 찾는다고 해 잠시 연단에서 내려오니 이선배가 급히 다가와서 다짜고짜 내 팔을 이끌며 이곳을 잠시 피하라는 것이다. "당신은 오늘 경찰의 체포 대상 1호로 되어 있어 잡히면,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 일단 자리를 피하자" 라면서 내 팔을 잡아 이끈다. "어떻게 제가 이곳을 떠날 수 잇습니까?" 라는 나의 항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기자완장을 찬 웃저고리를 벗어 나에게 입히는 것이다.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친구들도 그게 좋겠다면서 등을 떠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동지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기자로 가장을 하고 성공회 뒷길로  도망(?)을 쳤다. 

막상 피신을 하려하니 어디로 갈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얼핏 상과대 진용섭의 집이 바로 지척이라는 생각이 났다 (지금의 코리아나 호텔 바로 뒷집이었다). 진군의 집에 들어서니 진용섭의 소식을 몰라 애타하던 진군의 누님과 경기여중 3학년의 여동생이 나를 보더니 죽은 사람이 돌아 온 것 처럼 호들갑을 떨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냉수 한 사발  얻어  마시면서 생각을 해보니 후회막급이었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여기에 그냥 죽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을 다시 잡어 먹고 못 가게 매달리는 누님과 동생을 뒤로하고 진군의 집을 나와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바라보니 데모대는 경무대로 간 것이 분명했다. 뛰기 시작했다 (나는 고교시절 럭비, 유도, 빙상을 좀 해서 다리 힘이 강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정도에 다다랐을 때 탕 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콩 볶는 듯 한 총소리가 경무대 방향으로 부터 들려오는 것이었다. 총소리에 그만 얼어 빠져 망연자실한 상태로 서 있는데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데모군중들이 중앙청 앞쪽으로 뒤돌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현장을 잠시 비운 후 일어난 사건들을 경무대 바리케이드 바로 앞에 섰던 노흥권과 선두 대열에 있었던 한승주, 정종문 등의 증언을 빌려 몇 마디만 극히 사실적으로 적겠다. 내가 의사당 앞을 떠난 후, 경무대 앞에서 흉탄에 쓰러져 순국한 수학과 김치열 등은 경무대로 가자고 강력히 주장하고, 뒤쪽에 있던 동국대생들의 호응으로 데모대는 경무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데모대가 통의동 파출소 앞에 도착하니  약 150명 정도의 전투복장을 한 경찰들이 소위 제 1차 경무대 저지선으로 통의동파출소와 해무청사이 중간에 높은 가시철망의 목제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그 뒤로 최루탄과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늦게 도착한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학생들과 서울상대, 약대, 사범대학생들이 가세한 우리 서울대(약 3000명), 동국대(약 1000명), 동성고(약500명)이 주력을 형성하고 타 대학 학생들, 그리고 수많은 청소년, 시민들이 뒤 엉켜서 일단 연좌데모로 들어갔단다( 참고로 당시 서울시내 대학교의 학생 수는, 종합대학교 학부의 경우 서울대가 8,000명 연고대가 3000명 정도 동대, 중대는 2000명 단과대학들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데모군중의 수는 계속 불어나고 주로 동대생을 중심으로 보다 과격한 데모 대원들이 바리케이드를 뜯어내고 일부 시민 청소년들이 지프차 트레일러를 끌고 와 바리케이드를 부수자 시위대들이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바리케이드 뒤편, 왼쪽 도로변에 위치한 국민대학 학생들이  뛰어 나오기 시작함으로서 당황한 경찰이 소방차 2대를 엔진을 켜 둔 채로 후퇴를 하고 시민 몇 이는 버려진 소방차를 몰고 최후 저지선(경호실소속 경찰, 군인으로 추정됨)으로 돌진한 순간 실탄 발포 명령이 내려지고 조준 사격이 시작되었다고 진술을 하고 있다.   

다른 적당한 지면을 찾기가 어려워서, 이날 경무대 앞에서 순국한 우리 서울대 사망자 명단을 적어야겠다. 역시 서울대 학생들의  수자와 선두 위치 때문에 이 자리에서 7명이나 사망을 했다.  대학별로 보면 최다이다. 면면을 보면  문리대의 김치호, 미대의 고순자, 법대의 박동훈, 사범대의 손중근과 유재식, 상대의 안승준, 사대부중의 원일순(당시 14세) 등이고 그 다음으로 동국대에서는 1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이들이 그날, 그순간 최전방에 서서 싸우던 가장 용감한 4.19혁명의 영웅들이다(타대학의 순국자들에 대한 기록은 이미 공지의 사항이라서 이 자라에서는 언급을 안켔다). 

이 비극적인 순간에도 웃을 수 밖에 없는 미담(?)이 있어 소개한다. 우리 문리대에는 여학생들이 꽤 있었는데 김옥현이라는 멋을 부리던 불문과 여학생이 있었다. 엷은 화장에 항상 하이힐을 신고 다녔는데, 폭풍이 지나간 후 나를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별장 다방에서 잠시 만났다. 그 멋쟁이 옥현양도 그날 경무대 앞에서 비교적 앞줄에 서서 악을 쓰고 있다 총격이 시작되자 도망을 쳤단다. 앞에 뛰는 남학생들을 따라 진명여고 쪽으로 정신없이 뛰다가 숨이 차서 잠간 섰는데, 어느 남학생이 다가 오더니 무엇을 불쑥 내 밀더란다. 가만히 보니, 자기의 하이힐 한 짝이었다. 자기는 뛰다가 한쪽 신발이 벗겨 진 줄도 모르고, 한 짝만 신고 뛰었는데, 한 문리대 남학생이 그 경황에서도 그 한 짝을 주워서, 돌려주려고 뒤쫓아 온 것이다.  기사도가 따로 없다! 그 학생을 찾아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결국 못 찾았다.  

이제 우리는 서울대 의대생들이 펼친 그날의 헌신적인 활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장에서 나는 처음에 의대 학생들의 호응도가 낮았다고 기술한 바 있는데 우리 본대와 같이 동숭동 캠퍼스부터 합류해서 처음부터 같이 행동한 그룹이 많지는 않았으나 꽤 있었고, 그 후  우리가 무수히 맞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의대생들이 합류하러 오다가  총격사건을 접하고 눈부신 구호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참으로 절묘하게 시간을 맞추었다 할까, 의대병원 본부와 연락하여 의료장비와 앰뷸런스를 지원받아 많은 인명을 구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크나 큰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나는 도망해 오는 서울대 학생들을 규합하여 (구) 한국일보 앞에 집결하여 대오를 갖추고 질서정연하게 동숭동 교정까지 행진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해산을 하였다

 4월 25일 교수단데모

다음은 교수단 대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교수단 데모에 관한 사료가 많지 안타지만 사실은 서울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1971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후부터는 4.19와 관련해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고 50주년 때까지는 일체의 기고도 하지 않았다).  4.19 날 당일 학교 캠퍼스에서 해산을 한 후 일단 경찰체포를 우려해 나는 이강준, 김석산과 함께 노량진에 사는 4촌 누나의 집으로 일단 피신을 했다. 이틀이 지나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어 전화가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하던 중 가까운 친구 사회학과 이충호와 연락이 다았는데 같은 사회학과 조봉래가 나를 중요한 일로 급히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조봉래는 나보다 한반 위의 4학년이었는데 이충호와 김석산도 실은 고등학교로 보면 나보다 일 년씩 위였다. 특히 김석산과 조봉래는 사대부고 동기 동창이어서 나와도 가까히 트고 지내던 사이다. 급히 시내로 들어와 이충호 김석산 등과 함께 혜화동 다방에서 만났더니 다짜고짜 자기 집으로 가서 자신의 아버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조군의 아버님, 조윤제교수님은  당시 성균관 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사학자로서 권위와 명성을 전국적으로 인정받고 계시던 아주 유명하신 분이었다.

댁이 바로 명륜동 성균관대 앞 한옥이었는데 도착하니 조교수님은 자그마한 서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선 학생들이 큰일을 해내었다고 장하다는 말씀 끝에 이제는 우리 교수들이 나서야 할 때라고 하시면서 이미 여러 교수 분들과 상의가 되어 거사일 까지 4월 25일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내심 좀 놀랐다. 그 당시 훌륭한 교수님들은 많이 계셨지만 학자로서 학문에만 몰두하시는 분위기였지 요새처럼 현실사회참여에는 별로 관심들이 크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더욱 긴장이 됐는데 선생님의 요점은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선언문, 결의문, 프라카드 인쇄 제작 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당일 학생들의 호위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이희승선생님을 비롯해서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많으시고, 또 숫자로도 세가 좀 부족할 것 같으니 될수록 많은 수의 학생들이 그날 참여 해 주길 바란다는 요지였다. 우리는 물론 찬동을 하고 저희들로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그때는 주동자급 친구들은 이미 지방 등으로 대부분 피신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였든 우리는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물러나왔다.

다음 날 나는 모을 수 있는 친구들을 현재 대한극장 옆에 있던 나의 삼촌 집으로 불러 12명 정도가 모였다. 우리가 사전 모의 때 사용했던 집은 이미 아버님께서 폐쇄를 해버리셨다.    그때 참석했던 인물들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이충호, 이강준, 김석산, 노흥권, 권혁조 등 문리대 학생들과, 고대의 촤완준, 장영백, 김덕배, 경희대의 정용택 등이 었는데 나머지는 친구들에게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한참 동원 전략을 짜고 있는데 사단이 났다.  갑자기 나의 아버님이 들이 닥치신 것이다. 나는 집안의 장손인데다가 10살이 될 때 까지 유일한 아들이라 집안에서는 가의 절대적인 사랑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4.19 날 당일에는 나를 찾아 어머님께서 온 서울 장안을 헤매시다가 엄지발톱 두개가 빠지셨다.  참으로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그런데 계엄 상황인 상태에서 또 친구들을 불러 모아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숙모님의 제보를 받으시니 기가 막히셨을 것이다. 원래 과묵하신 성품 이셨는데 너무도 화가 나셔서 말씀도 제대로 하시질 못하시고 무조건 "나가라우" 만 웨치고 게셨다. 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정신없이 탈출(?)을 했는데 문제는 앞서 언급한 HID의 정용택군이다. 정군은 보통은 사복을 입었는데 당시가 군 계엄 때이니까 군복과 군화를 신고 왔다. 다른 친구들은 잽싸게 신발을 신고 도망을 쳤는데 군화를 급히 신으려니 이게 마음대로 될 턱이 있겠는가?  결국 그날 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지난 달 모임에서도 그 말이 나와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의 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버님 애칭이 "나가라우" 가 되어 버렸다.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4월 25일 오후 3시 경 함춘원 서울대 교수회관 앞으로 약 8-90명 정도가 모였다. 내가 조봉래로 부터는 4시경 출발로 통고를 받았으나 우리는 2시쯤부터 문리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교수회의는 아직 끝나지 않아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한참을 지나 드디어 200 여명의 교수님들이 잔뜩 긴장 한 상태로 나오시더니 큰 프라카드를 펼치시는데 그 내용을 보고는 우리 모두는 아연실색 입이 딱 벌어졌다.

"이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후, 마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울의 4.19 까지 학생은 물론 과격시민들 까지도 (데모 중에 한 두사람 예외는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도 공식적으로 이승만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거나 강하게 개인 이승만을 비난한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우리 서울대 선언문애서의  “백색독재 타도" 정도였다. 그만큼 국부로서의 이승만, 애국자 이승만의 카리스마 내지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대한민국 국민들 속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하튼 행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교수님들을 좌우로 호위를 하면서 구호를 합창하면서 종로 5가로 들어서니 시민 학생들이 따라 붙기 시작하면서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 광화문에서 돌아 국회의사당에 도달하였을 때는 군중들의 수가 최소 3-4만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선언문 낭독과 교수 몇 분의 연설이 끝날 무렵에는 날이 이미 어두워 졌는데 군중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일부 시민들은 계엄군을 에워싸기도 하고 일부는 탱크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 당시 계엄군은 절대 중립을 지키고 표정들도 지지도 반대도 아닌 극히 무표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희승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혹시 일부 과격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 우발적인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큰일이니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뜻을 받들어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탱크위로 올라가 메가폰을 잡았다.   시민들에게 계속해서 해산을 권유하는 말들을  했는데 무엇이라고 떠들었는지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얼마 전, 정치과 동창 김규화군이 그날 광화 문쪽을 지나다 그 장면을 보고 지금까지 기억이 선명하다며 본인은 다음날이 군 입대 예정일이라 데모에 참가치 못해 안타까웠다고 말한 일도 있다. 나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그러나 학생, 시민들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날도 완전히 어두워지고 치안상태도 안 좋으니 우리는 교수님들을  빨리 귀가시켜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친구들이 가급적 본인 집과 같은 방향의 교수님들을 댁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하고 나는 김석산과 함께 이희승 선생님을 맡기로 했다. 김석산의 부친은 우리나라 동양 사학계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문리대 김상기교수님으로 이희승선생님과는 막역한 사이. 그런데 무교동을 지나던 중 선생님께서 갑자기 막걸리를 한잔 하시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매일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할 때니 마다 할 턱이 만무, 마침 가끔 가던 드럼통 곱창구이 집이 근처에 있어 그리로 모셨다. 그런데 막걸리를 몇 잔 마시시더니 선생님께서 그 카랑카랑하신 목소리를 최대한 끌어 올려 "이승만은 물러가라"를 외치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니고 막걸리 한모금 안주로는 "이승만은 물러가라" 이었다. 시세말로 대책이 없었다. 겨우 모시고 나와 동숭동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  이상이 4월 25일 역사적 교수단 데모 날의 나의 일기다.

4 19 전국학생대책회의

마지막으로 4월 25일 이후 학생들의 활동을 내 경험만을 토대로, 내가 느끼고 본 것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코자 한다. 교수단 데모가 끝난 후 26일 정확히 어떤 경로로 통고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한데 낙원동 소재 정치대학 (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에 서울에 위치한 종합대학교와 단과대학 학생대표들이 모였다.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숙대, 동국대 등 큰 대학들은 물론 단국대, 숭실대, 정치대 등 통칭 28개 대학교 및 대학들로 부터 각 2명 (혹자는 5명씩 참석 했다고 하는데 서울대에서는 나와 의과대학에서 4.19 당일 의료 활동을 진두지휘한 신모군 2명만 참가한 것은 분명하다) 씩 소위 대표자격으로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전국 학생 대책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데는 공감을 하면서도 워낙 개성이 강한 친구들이 많아 각론에서는 좀 시끄러웠다. 마침 내가 발언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친구였는데 갑자기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여러분, 지금 하야하신 이승만 대통령께서 이화장으로 관용차를 탈 수 없다며 걸어가시고 있다. 우리 모두 나아가 환송을 해드리자" 라고 외치는 것이다.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박사 문제에 개인적으로는 그리 각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박사의 퇴진은 우리의 주장이었고 불과 1 주일 전에 무려 200명 (그 때는 정확한 사망자 수자가 나오자 않고 있던 때) 이 바로 그 자리에서 꽃다운 목숨을 잃었는데 지금 우리가 나아가서 박수를 친다?  이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반박을 해서 겨우 진정을 시켰다.

다음이 더 큰 문제였다. 집행부를 구성해야 하는데 연세대의 강맹구, 이화대의 장순옥, 숙대 등에서는 4.19 거사 당일은 서울대문리대가 중심이 된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니 위원장은 서울대 즉 나 보고 맡으라고 추천을 하고 있었는데, 일각에서는 고려대에 맡기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자 성격이 좀 화끈한 강맹구는 그럼 투표를 하자고 나왔다. 나는 누가 이기든 별로 바람직 하지 않은 상황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데모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나라가 거의 무정부에 가까운 상황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었던가? 또 수많은 동지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끼리 감투싸움이나 벌인다면 의거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물론 수많은 시민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두려웠다. 그래서 강맹구와 장순옥을 통해 제안을 했다. 서울대와 고대가 모두 앙보하고 일단, 작은 대학에 임시로 위원장을 맡기자는 아이디어였다. 모두 찬성을 해서 결국 전체 학생 800명, 시위주역도 아닌 단국대학으로 낙찰이 됐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서울대와 가까웠던 타 대학 학생들로 부터 시달림을 좀 받았다. 둘째가 더 큰 문제였다. 발언권이 약한 대학에서 집행부를 맡으니 강한 지도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여러 가지 효율 면에서 아쉬운 일들이 많이 발생했다. 우스갯소리로 목청 큰 사람이 행세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꽤 많은 대표들이 미온적이 되거나 심지어 이탈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래도 워낙 정치색이 강하고 적극적이었던 친구들이 많아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현실참여의 목소리도 나왔다. 나는 학생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데는 반대하는 편에 서 있었다. 그래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 건립에는 적극 찬동을 하고 그 일에 가장 앞장섰던 고대의 이기택에게는 힘을 실어 주었다.  좀 우수광스러운 일도 벌어졌다. 당시 정권은 무너졌고, 경찰수뇌는 다 도망 가버렸고, 계엄사령부도 아직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 했기 때문에 서울 치안이 위태롭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제안이 우리가 일단 최소 서울만이라도 치안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누가 먼저 제안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여하튼 서울의 각 경찰서에 학생들을 파견하자는 안이었다. 대학별로 경찰서를 맡았는데 나와 서울대는 서울시경를 맡았다. 시경국장실을 차지하고 실질적인 국장행세를 한 웃지 못 할 사건이다. 경찰은 극히 협조적이었는데 다행히 별 대과 없이 3일간의 업무(?)를 마치고 계엄사 치안처장의 지시로 철수를 했다.  당시 계엄사령부에는 치안처라는 부서가 있었는데 처장은 육군 준장 이석봉장군이란 분이 맡고 있었는데 상당히 합리적이고 온건한, 우리와 협조가 잘되던 분이었다. 이승만대통령과 학생들의 대담에서도 이장군이 직접 나서  학생들을 경무대로 안내를 했다. 이북출신으로 중앙고 출신이다. 나와는 사적 인연이 좀 있었고 후일 내가 논산에 신병으로 입소했을 때 훈련소 교육담당 부소장으로 계셔서 덕도 좀 보았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당시 송요찬장군의 계엄사령부는 절대적 중립을 유지하면서 비정치적으로 운영을 했다는 점에서 좀 더 후한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 생각이다. 사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한 송요찬의 계엄사령부는 두 갈래에서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물론 첫째는 미국대사관과 8군사령관으로 부터의 압력과 협의가 가장 크고 또 실제로 결정적 작용을 했다. 다른 하나는 역시 자유당 정권으로 부터의 압력이었다. 당시 송사령관의 부관으로 미국 측과의 대화에 통역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장교가 김운용 (후일 한국 태권도와 올림픽에 지대한 공을 세운) 당시 소령이다. 나와는 고교 선배에다 사돈의 6촌 쯤 되어 평생 가깝게 지낸 관계로 많은 비사를 들었지만 이 자리에서는 지면제한도 있고 해서 다른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여하튼 미국 측과의 협의 내지 메시지는 계엄군의 정치적 엄정중립과 군정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자유당정권의 실세들의 입장에서는 송요찬 계엄군의 비호 내지 지원이 없이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결론적으로는 미국의 개입이 자유당 정권의 몰락 내지 항복을 이끌어 냈다고 말해도 무방 할 듯 싶다. 그래서 김운용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자유당의 많은 실세들이 송장군에게 전화를 했는데 특히 국회부의장이엇던 한희석의원이 가장 집요했었다고 했다. 충청도에서는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의 일인자에는 오른 인물이 없지만 대신 2인자에는 충청도 출신이 많다는 것이 나의 지론인데 (장면정권의 김영선, 박정희정권의 김종필 등등) 자유당 말기 이기붕에 이어 제 2인자는 당시 민의원 부의장 겸 자유당의 정부통령 선거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충청도 천안의 한희석의원으로 보아야 한다.  송요찬은 고향이 청양이다. 초기에는 몰라도 장군이 된 후에는 동향 한희석의 도움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한희석이 가장 집요하게 송요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송장군은 자유당 쪽에서 오는 전화를 전부 끊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김운용 당시 부관의 증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당시 계엄사는 학생들과 우리 대책위원회에 상당히 우호적이고 협조적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정치인들이었다. 여러 경로로 접촉이 들어 왔는데 세 가지 일화만 소개하겠다.  제일 먼저 내가 만난 정치인은 성곡 김성곤의원 (달성군)으로 그 당시 이미 여러 기업과 동양통신, 연합신문 등을 소유하고 있던 분이다. 나는 사실 성곡 선생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나의 아버님은 성곡의 보전 1년 후배고 유명한 축구선수 이었는데 성곡은 그 당시 유도부장으로 보전 호걸파의 두목이셨단다.  두 분은 그때부터 친한 사이였고 아버님 말씀으로는 이 어른은 일찍이 대구 고등보통학교 때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퇴학까지 당했던 우국지사라고 늘 자랑삼아 말씀을 하셔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김의원과의 만남은 고대의 누군가가 자리를 만들었다.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 (구 중앙 도서관옆)에 동양통신사 건물이었는데 1층 회의실에 우리 10여명 정도가 참석을 했는데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 주시면서, 특히 고대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시었다.  즉 4월 19일 데모대의 일부가 신문사 앞을 휩쓸고 지나가는데 일부 과격 학생 등이 이 빌딩에 불을 지르려했다. 그때 고대학생 몇몇이 나서서 말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일이 실제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인데 하여튼 고맙다고 하시니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있을 수밖에.  문제는 모임이 끝나고 나오는데 성곡께서 무슨 흰 봉투를 하나씩 주시었다.  나는 무슨 서류나 편지 같은 걸로 알고 별 생각 없이 받아 들고 나와서 친구들과 열어 보니 돈이었다.  당시 가치로는 꽤 큰 액수였다. 어안이 벙벙.  내가 받아 본 최초의 촌지였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공인은 이유 없는 돈은 절대  받으면 안 된다. 특히 사업하는 사람으로 부터 돈을 받는 순간 코가 뀌게 된다. 네가 나중에 정치를 하던, 관리를 하던 내가 먹고 살 돈은 대 줄 것이니 절대 돈 문제에서는 깨끗해야 한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있던 때이기에 은근이 부아가 났다.  그날 저녁 몇몇 친구들을 불러 내 밤새 그 돈이 다 떨어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모임은 미국대사관으로 점심 초대를 받은 자리였는데 당시 대리대사였던 Marshall Green (Groton고, Yale대 출신의 정통 국무성 관료)이 호스트를 했다. 이번에도 대책위 멤버 전원이 아니고 10명 정도만 참석했는데 이때는 이미 이박사 하야와 계엄사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었다. 특히 월터 맥카나기대사와 이박사의 1시간여의 비밀회동에서 주요 사안 대부분이 이미 결판이 났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지금의 USIS 건물이 당시 미국대사관이었는데 그 1층 식당 같은데서 만났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정치적으로 특별한 내용은 없고 주로 민주주의와 사회질서의 중요성 같은 일반적인 이야기와 학생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는 외교적 수사가 전부였던 것 같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속담이 생각날 정도. 

그 다음 생각나는 것이 정일형박사 (1950년부터 8선의 국회의원, 미국유학 후 일제 말에 귀국, 군정을 거쳐 건국과정에서 많은 일을 하신 거목, 4.19 당시는 민주당 신파 중진) 께서 자택 조찬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시었다.  학생들은 이미 큰일을 해냈으니 이제는 학원으로 돌아가 실력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어떻게 보면 당시 야당정치인으로는 “학생들은 이제 학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말씀을 직선적으로  그리고 강력히 하신 유일한 정치인 이였다는 것이 나의 평가다.  특히 나를 보고는 해외유학을 권유하시기도 했다. 같은 이북출신이고 선거구가 중구 (우리 집은 주로 필동과 예장동) 이였기 때문에 우리 집안과는 왕래가 있었다. 이외에도 민주당 중진들 여러분과 이동원 전 외무장관 등이 관심을 보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현실참여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군 입대를 서둘렀다. 정박사님의 조언이 없었어도 이미 미국유학을 구상하고 있어서 사실 징집영장이 나오지도 않았는데도 동회에 부탁을 해서 영장을 받고 1960년 7월 친구 몇과 함께 입대를 했다. 내가 군에 입대한 후 한국의 학생사회는 급속도로 분화되면서 복잡하면서도 정치적으로 후일  큰 의미를 지니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현역 군인의 신분이어서 나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후 4.19 혁명과 관련해서는 1971년 귀국 후에도 별로 활동을 한 것이 없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 두 가지다. 지금이 내가 알고 경험한 것을 역사에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  둘째로는 내가 요사이 읽은 4.19에 관한 글들, 특히 서울대와 관련된 글들 (사실 나는 4.19에 관한 글 들을 최근까지 거의 읽어 보지도 않았다)의 내용이 내가 아는 사실과는 큰 차이가 있어 이제는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언급된 "내가 직접 경험한 것, 행한 일, 한말"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겠다.   

지금도 시청, 광화문, 청와대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날의 감회에 젖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180여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깊은 연민과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우리 주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죽은 사람은 한명도 없는것 같아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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