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60주년
4·19 혁명 60주년
  • 김용훈 편집장
  • 승인 2020.04.1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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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60주년을 맞았다. 그간 혁명은 끊임없이 기념되고 추모됐다. 4월이 함축하는 정신을 규명하고, 완수되지 않은 과업을 집어내고, 결과와 의의를 평하려는 노력이 거듭됐다. 하지만 과거를 기린 횟수가 쌓여가는 만큼 60년 4월과 신입생의 거리는 멀어져만 갔고, 의의와 계승은 고사하고 당시 사건의 경과와 교정의 모습조차 대학의 기억에서 희미해져갔다. 『대학신문』은 잊힌 역사를 다시 그려내고, 지난 60년간 서울대가 그들을 기억한 방식을 조망하고자 했다. 사건을 몸소 경험한 김광 전 명지대 교수, 유세희 명예교수(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아산정책연구원 한승주 이사장에게 증언을 듣고, 그들의 회고록, 사료, 『대학신문』의 보도를 대조하고 엮었다.

60년 전 서울대, 가난하되 뜨거운

4월을 회상하는 작업은 사건의 배경이 되는 교정을 떠올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1950년대 후반에 재학한 인터뷰이들은 가난했던 동숭동의 풍경을 먼저 기억했다. 김광 전 교수는 “전답 팔아서 공부하고, 하숙비 없어 ‘가정교사’를 하며 지내는 학생이 많았다”라며 어려운 학생이 다수였다고 이야기했다. 유세희 명예교수 또한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도 채 되지 않을 때”라며 “모두가 가난하니 격차도 느껴지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서울대학교 학생지도연구소’가 1962년 재학생 약 9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22.8%가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할 만큼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1966년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48.4%가 학비 전체 혹은 일부를 스스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대학가엔 지금과 사뭇 다른 생활상이 펼쳐져 있었다. 유세희 명예교수는 “놀 거리가 많지 않았다”라고 기억한다. 식당가와 문화 시설이 빼곡히 들어선 지금의 대학가와 달리, 당시 동숭동은 무언가를 즐길 만한 곳도, 즐길 만한 형편이 되는 학생도 없었다. 유세희 명예교수가 말하길 공강 시간에는 중국집에 시계를 전당 맡기고 외상으로 밥을 먹기 일쑤였으며, 돈이 없어 갈 곳도 없으니 학교 앞 ‘학림 다방’에서 마실 것을 시켜놓고 이야기에 집중할 때였다. 당시 대학가에서 오락이라 하면 토론과 이야기, 기껏해야 당구장 정도였다는 것이다.

동숭동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자주 모였던 ‘학림 다방’의 모습이다.(사진 출처: 서울대학교 70주년 사진집)
동숭동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자주 모였던 ‘학림 다방’의 모습이다.(사진 출처: 서울대학교 70주년 사진집)

그렇다고 대학가가 침체된 분위기로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 60년사』는 “사회 전반의 낮은 경제 수준으로 말미암아 학생들 역시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라면서도 “그들의 대학 생활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압도했다”라고 서술한다. 유세희 명예교수는 당시 학생들이 매일 토론과 대화를 일삼는데, 그 주된 주제가 국가, 사회, 민족 등 거시적인 대상이었다고 돌이켰다. 그는 “다소 관념적인 측면이 있고 ‘엘리티즘’의 요소도 있었다”라며 “그럼에도 당시엔 민족과 미래를 걱정하는 학생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그런 교정에서 저항 의식과 반발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벌어진 고등학생들의 시위, 3월 15일 자행된 부정 선거 등이 4월의 도화선이 됐고, 한승주 이사장에 따르면 직접적인 사건 외에도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 근본적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 쌓이고 있었다.

4·19 혁명이 벌어져 강의실은 텅텅 비게 된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4·19 혁명이 벌어져 강의실은 텅텅 비게 된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터져나온 학생들, 현장의 증언

결국 시간은 흘러 4월 19일에 닿는다. 그 과정은 큼직한 사건과 인과로도 설명될 수 있으나, 그 설명에는 개인의 세밀한 기억이 결여된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듣기 어려웠을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 속 내밀한 사정을, 당시 참여자들의 기억으로 짚어봤다. 

◇모여드는 학생들=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3월 15일 부정선거 당일 제1차 마산 시위에 참여한 그가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직격된 것이다. 그 소식이 기폭제가 돼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제2차 마산 시위가 이어졌고, 그 직후 당시 서울대문리대 정치학과에서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유세희 명예교수는 특히나 대구의 경북고 출신 학생들이 적극적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2월 28일 대구에서 경북고를 비롯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라며 “학생 서클 ‘후진국문제연구회’에 대구 경북고 출신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자극을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유세희 명예교수와 김광 전 교수 모두,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 따지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학생들은 자연스레 모여들어 거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았다. 

◇거사는 21일, 착실히 준비되는 시위=시위는 21일로 예정됐고, 남은 것은 준비뿐이었다. 『서울대학교 60년사』에 따르면 항쟁 주도 학생들은 각 단과대 및 다른 대학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격문과 구호 전단을 인쇄하고, 플래카드를 준비했다. 

당일 캠퍼스 곳곳에는 격문이 나붙는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당일 캠퍼스 곳곳에는 격문이 나붙는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김광 전 교수는 “40명가량이 모여 5명씩 8개 조로 나뉘어 서로 다른 임무를 맡아 준비를 주도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시위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조씩 순서대로 경찰에 잡혀가 책임을 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면 퇴학은 물론이고 형무소에 잡혀가 고문을 당할 위험이 큰 가운데, 그들은 책임과 결의를 담보하기 위해 연판장 역시 작성했다. 김광 전 교수는 “모두가 연판장에 서명을 하고 날인했다”라며 “한 조가 시위에 대한 책임을 졌을 때 다른 조 역시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맡도록, 언제든 연판장을 경찰에 공개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장치를 두었다”라고 설명했다. 

◇18일, 예상하지 못한 고려대 사건=살얼음판을 걷듯 시위를 준비하던 중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고려대 학생들이 4월 18일 먼저 시위를 벌였고, 돌아오는 길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다. 서울대에서 시위를 계획하던 학생들은 거사를 이틀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들은 주도 학생들은 서울대 의대 뒷동산 ‘함춘원’에 긴급히 모여 향후 방침을 논의했고, 여러 대안 중 거사일을 당길 것을 택해 결의했다고 한다.

21일로 거사일이 정해지고 서울대와 고려대가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음에도 일정이 들어맞지 못했다. 김광 전 교수는 “그것을 두고 최근까지도 서울대 졸업생들이 고려대를 공격하곤 했다”라며 “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공명심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 내 시위 주도 학생들은 고려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몇몇 고려대 학생과 일정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려대 학생이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고려대 학도호국단에 일정을 전달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광 전 교수는 “신중함이 때를 놓치게 한 꼴”이라고 아쉬워했다. 

◇길고 긴 화요일=그렇게 급작스럽게 일정이 조정돼 시위가 계획되고, 아침이 밝았다. 『서울대학교 60년사』는 오전 8시 50분 동숭동 캠퍼스 전역에 격문이 나붙고 9시 20분 문리대 학생 2백여 명을 시작으로 법대, 미대, 약대, 음대, 수의대, 치대 등의 학생들이 함께 시위를 열었다고 서술한다. 시위대는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과 경무대(현 청와대)로 나아갔다. 『대학신문』 325호엔 동선을 그린 그림과 함께 “9시 20분 서울대 정문을 출발한 데모대는 독재의 아성인 경무대에 이르기까지 아홉 군데서나 경찰의 저지에 부딪혔다”라는 설명이 적혔다. 참여자의 증언과 『대학신문』의 보도, 사료에 따르면 시위대는 서울대 교문, 동대문경찰서(현 서울혜화경찰서), 탑골공원, 경무대 앞에서 치열한 충돌을 겪었다. 

『대학신문』 325호에 실린 4·19 시위대의 진행 경로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대학신문』 325호에 실린 4·19 시위대의 진행 경로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시위대는 경찰의 곤봉을 맞아가며 전진했다. 김광 전 교수는 “경찰들이 그저 경찰봉으로 시위대를 밀어내는 것인 줄 알았으나 곤봉으로 내려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라며 “유세희 등 몇몇 친구들은 머리를 다쳤다”라고 기억했다. 실제 유세희 명예교수는 어깨와 머리를 두들겨 맞아 “머리에서 피가 심하게 흘러내리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 없어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경찰들에게 곤봉으로 맞고 있는 문리대 학생들의 모습.(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경찰들에게 곤봉으로 맞고 있는 문리대 학생들의 모습.(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시위대가 곤봉 세례를 견디고 경무대에 이르렀을 때는 경찰의 발포를 마주해야 했다. 아산정책연구원 한승주 이사장은 “맨손의 시위대에게 공포탄도 아닌 실탄을 쏘았다”라며 엎드린 채 총소리가 멎길 기다리는 동안 주마등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그때 백 명 이상의 시위 군중이 사망했고, 그중 서울대 학생은 여섯 명이었다. 김광 전 교수는 “경찰이 도망가는 사람을 조준했다”라며 경고가 아닌 살상의 목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시위대가 국회의사당과 경무대로 향하자 경찰들은 진압·저지를 시도했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시위대가 국회의사당과 경무대로 향하자 경찰들은 진압·저지를 시도했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김광 전 교수는 시위 당시 서울대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대학들보다도 많은 수의 학생이 참여하고, 더 거센 저지를 받아가며 진출한 것이 서울대였다”라며 “선봉에 있었기에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가 적을 수 없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대학생의 힘’이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대학생의 힘’이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그렇게 성취한 민주주의=이후 정권은 계엄령을 내리고 집회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수습하려 하지만, 4월 25일 대학 교수 2백여 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내세우며 판도가 완전히 뒤집어진다. 김광 전 교수는 “플래카드에 ‘대통령 하야’가 적힌 것을 보고 아연했다”라며 학생, 시민 시위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문구를 교수들이 내걸은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다음 날 시민들과 학생들은 다시 모여 시위에 나섰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한 뒤 하야하게 된다.

역사를 기념하는 역사,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을 치러가며 값진 승리를 스스로 일궜으니, 학생들이 혁명의 의미를 되새기고 희생한 영령을 추모하는 데 성심을 다한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자부심이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역사를 기억하도록 추동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며 역사를 기리는 역사, 다시 말해 4·19 혁명을 기억하는 태도는 점차 바뀌게 된다. 『대학신문』의 기사를 참고해 대학가의 4월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조망했다.

1960년 5월 19일 혁명 1주월을 맞아 추모식이 열렸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1960년 5월 19일 혁명 1주월을 맞아 추모식이 열렸다.(사진 출처: 『대학신문』 DB)

혁명 직후 매 4월 서울대는 커다란 기념식을 열었다. 많은 학생이 모여 4·19 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혁명 10주년을 맞은 1970년 4월 20일 자 『대학신문』 1면에는 “부정 거부한 10년 전 그날 감격 되살려”라는 부제를 달고 “대학별로 기념식 거행”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각 단과대학이 풍성한 행사를 가졌다”라며 토론회, 심포지엄, 공연, 체육대회 등이 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행사 없이 기념하는 해도 있었다. 1974년 4월 17일 자 『대학신문』은 “평온한 속에 4·19 얼 되새겨”라는 제목으로 “예년과는 달리 별다른 행사 없이 조용히 (기념 행사가) 진행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점차 기념식이 “조촐히 거행”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가운데, 1980년 4월 21일 20주년을 맞아 『대학신문』은 “기념식 5년 만에 성대히 열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낸다. 이 기념식에서 당시 고병익 총장은 “4·19 탑을 뜻 깊은 장소로 이전한다”라고 약속하는데, 이후에도 기념탑의 위치는 ‘4·19 정신을 외면하거나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냐’라는 논란에 휘말리곤 한다. 예컨대 그로부터 13년 뒤인 1993년 4월 19일 자 신문은 “기념탑이 공대 폭포 옆쪽에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어 4·19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기념탑은 2002년 인근 위치한 다른 탑들과 함께 두레문예관(67동) 옆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4·19 기념식은 시대가 변하며 민주주의 이상의 새로운 의미를 담기도 했다. 1997년 신문에 따르면 당해의 기념식은 “사회적 인권 확장을 위해 직접 뛴다”라는 의미를 담고 4·19 뜀박질 대회를 개최했다. 2000년에는 ‘4월 혁명 정신 계승, 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4·19 뜀박질 대회’가 열려 △민중 생존권 쟁취 △교육의 공공성 쟁취 △주한 미군 철수 △공기업 해외 매각 반대 등을 구호로 내걸었고, 2002년에는 신자유주의 반대를 기치로 삼았다. 그러던 중 2004년에는 뜀박질 대회가 ‘달리기’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학생 일부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지적을 수용해, 걷는 방식의 행사로 바뀌기도 했다.

기념식과 추모식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단과대별로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던 과거와 달리 기념식은 단출한 모습으로 변했고, 추모 행사에서 많은 학생이 탑에 참배하는 모습은 더는 보기 어려워졌다. 대개 보직 교수와 학생대표 몇몇이 참여하는 조촐한 규모로 열렸다.

4·19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이 계승하려는 시도 역시 눈에 띄었다. 1960년 혁명의 기치를 당대의 시대정신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4·19 혁명은 기념식의 규모보다도 재해석에서 계승의 의미가 빛날 것이다.

삽화: 김지온 기자 kion2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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