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지 취재부 차장
이현지 취재부 차장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 「입동」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어린 자식을 떠나 보낸 부부가 등장한다. 아이는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에 치여 죽었는데, 경제적으로 내몰려도 아이의 보험금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살아가던 부부의 앞에 추석 선물이랍시고 어린이집에서 보낸 복분자청이 도착하고 만다. 오배송이든 의도적으로 보냈든 부부는 당연히 복분자청을 방치한다. 그러나 사정을 몰랐던 시어머니가 이를 열었다가 발효된 것이 뻥 터지는 바람에 부엌 벽지에는 핏자국 같은 청의 흔적이 남는다.

소설은 붉은 흔적이 벽지에 말라붙고, 그것을 새 벽지로 도배하기까지 부부가 겪은 감정의 격랑을 담담히 제시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결국 부부는 벽을 새로 바르고 나서 보험금을 헐어 빚을 갚기로 한다. 자국을 가린다고 해서 그들의 슬픔이 가실 일은 없겠지만, 아이의 죽음과 복분자청 자국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람의 손에서 탄생한 이야기들에는 대개 의도적으로 배치된 요소들이 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과업으로 드러나고, 이를 위해 배경과 사건, 소품과 대사 등이 섬세하게 구성된다. 「입동」에서 복분자청 자국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이듯 말이다. 서사의 기승전결 또한 장르적 특성이나 개연성이라는 이름 아래 차근차근 전개된다. 따라서 이야기는 철저히 계산된, 또는 구성된 세계로서 존재한다. 다들 한 번쯤 즐겨 보던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결말을 때려 맞춘 경험이 있을 테다. 작가가 흘리는 힌트를 눈 빠지게 찾다 보면 우리는 적어도 이야기 안에서는 앞날을 예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언가’들은 이야기 바깥으로 나온 순간 돌팔이 점쟁이로 전락한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입맛대로 내가 살아갈 길을 짜맞춰 주지 않는다. 신이나 예지몽 같은 것을 믿지 않으니 나에게는 앞날을 넌지시 알려 주는 장치도 없다. 그렇게 아무런 의도 없이 세상이 그저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득하고 막막하기 짝이 없다. 내가 지하철에서 에어팟을 잃어 버린 것은 부주의로 인한 실수일 뿐 내면의 공허 따위를 드러내는 사건이 아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귀에 들어 온 노래 가사는 내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지시하는 거창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 주말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갑작스레 죽는다면 개연성이 없다며 시청자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겠지만 현실은 개연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앞에 상실을 달랑 던진다. 내일, 오늘 저녁, 아니면 당장 일 분 뒤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작가를 만들어 내서라도 그 멱살을 부여잡고 싶은 마음으로, 또는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은 심정으로.

코로나19가 몰고 온 파장도 그렇다. 2020년을 위해 세웠던 온갖 계획들이 바이러스의 대유행 때문에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것을 누가 상상이냐 했겠냐는 말이다. 개강이 미뤄지고, 공들여 준비했던 대외 활동이 연기되고, 비행기표와 여행지 숙소 예약을 내 손으로 줄줄이 취소하던 나날들이 그렇게 허탈할 수 없었다. 귀띔도 없이 휙휙 바뀌고 마는 미래가 미웠으나 내가 원망을 하든 말든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 갔다. 

그런데 반쯤 포기한 상태로 주어지는 일상을 살다 보니,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아주 당연한 깨달음이 찾아 왔다. 내일은 계획대로 흘러갈 수도, 엉망으로 어그러질 수도, 어쩌면 더 좋은 기회를 싹 틔울 수도 있겠지만 이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는 어차피 아무도 없다.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겠지만 네 뜻대로 되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얼마 전 저녁밥으로 돈가스를 배달시켜 먹었다. 치즈 돈가스와 고구마 돈가스를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고구마 돈가스를 골랐는데, 조금 뒤 가게에서 “재료가 모자라서 그러는데 혹시 고구마 돈가스와 치즈 돈가스를 섞어서 드려도 괜찮은가”라며 전화가 온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게의 제안을 수락했다. 저녁을 먹는 내내 기분이 좋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행운만 계속된다면 누가 앞날을 귀에 대고 일러주든 말든 상관없을 텐데 말이다. 

요즘 들어 신일숙 작가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명대사 “미래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진다”를 자꾸 곱씹게 된다. 마구 산란하는 가능성이 기꺼우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인생에 불쑥 등장하는 사건들이 여전히 두렵다. 나이를 먹으면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그래서 언젠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에서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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