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 그리고 대학
신록 그리고 대학
  • 대학신문
  • 승인 2020.05.24 0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택동 교수(화학부)
정택동 교수(화학부)

신록이다. 순환도로에 날리는 하얀 꽃비와 잎이 나기 전 일찌감치 피었다가 처절히 스러져가는 자목련이 봄을 알렸다. 아직도 그들이 가져온 봄의 자태가 뇌리에 생생한데 어느덧 여름 기운이 훅 느껴진다. 관악산을 뒤덮었던 어린 푸르름은 이제 많이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올해 내게는 하나 남은 것이 있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왔던 신록을 새삼스레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과거 나는 신록(新綠)과 녹음(綠陰)을 구분하지 못했었다. 그들 사이에는 수채화의 농담(濃淡)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다. 한여름 무성한 녹음으로 원숙해졌다가 결국 낙엽이 될지언정 신록은 한 시절 온 몸으로 봄을 뿜어낸다. 설익음이요 불완전함이다. 완성되지 못한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기실, 궁금한 것을 공부한다는데 그걸 취미가 아니라 일이라 여겨주는 곳이 세상에 대학 말고 어디 있던가. 연구와 교육은 산정하기 어려운 가치를 지닌다지만 요즘과 같은 세상에 제대로 하고는 있는 것인지 평가하기도 어려운 일에 시비 걸지 않고 돈과 자유를 주는 일이 어디 만만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대학이 그에 값할 거라 기대한다. 대학이 사회의 신록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기에 희망도 있다. 좋은 대학이 좋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이유다. 콩나물시루처럼 무조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험 보게 해서 졸업장 주어 내보내는 대학이 좋은 대학일 리 없다. 회사에서 당장 쓰기 좋은 사원을 맞춤형으로 만들어 납품하는 대학더러 좋은 대학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학은 불확실성이 클수록 사회에 확실한 기여를 한다. 불확실성이 무질서가 아니라 잠재력이 되는 일은 이성과 자아 성찰이 존중받는다는 전제가 충족될 때만 일어난다.

내가 속한 세대는 앞선 세대와 달리 별다른 의지 없이도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문제를 푸는 경쟁을 거쳐 고등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일방적인 방식으로 전달되었던 지식은 학생 모두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딱 맞지는 않았다. 한 해에 백만 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의 가능성과 꿈은 단 몇 가지 진로로 줄 세워졌다. 따라가는 건 빨랐지만 새로운 것은 나타나기 어려웠다. 그런 세대에게 미국과 서구 사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거기 가서 배워야 여기서 인정받았지만 정작 거기서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수억 명의 갈채를 받고 웸블리의 군중이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떼창할 때까지도 그저 경사스러운 ‘별일’이었다. 예전에는 엄두도 내기 힘들던 국제학술지에 순수하게 국내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가 게재되는 것이 다반사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주눅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끝마다 미국이나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런데 우리는 이렇다는 말이 후렴구처럼 따라다녔다.

전염병이 지구촌을 덮치면서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만 가늠되었던 국가의 소프트 파워가 뜻하지 않게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공공 시스템, 시민의식, 의료 수준에 일말의 의구심과 열등감을 품었던 사람 상당수가 이번 일로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맞은 듯하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 전 분야에 걸쳐 전문성의 수준이 높아지고 동시에 다양성의 폭이 넓어졌음을 실감한다. 무엇이 되고자 하든 개인의 노력을 성장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토대가 두터워졌다는 의미이리라. 오버할 필요는 없지만 자괴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 대학도 많이 달라졌다. 연구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고 교육도 일방적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측으로 무게중심이 많이 넘어왔다. 결국 화두는 다양성의 확대와 전문성의 심화다. 수만 명의 젊은이에게는 수만 개의 꿈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단 몇 개의 꿈을 강요할 때 신록은 찬란함을 잃는다. 우리의 대학은 더 다양한 분야에서 더 깊어져야 한다. 

대학의 필수 영양소는 정신적 자유다. 자유의 전제 조건은 자기반성과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는 지성적 행동이다. 그동안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받은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오만함,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무례함, 주관적인 최선을 객관적인 최선이라 눙치려 하는 안일함. 이 모든 것들이 대학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는 행위다. 각성도 행동도 없는 이에게 자유를 허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대학은 캠퍼스 경계를 넘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캠퍼스 안에서만 통하는 고준담론은 결과적으로 탁상공론일 확률이 높다. 환류되는 지식이라야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알 수 있다. 대학이 하는 일에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납득이 되는지 냉정히 되돌아볼 일이다. 대학에 대한 지원과 무간섭은 그 위에 얹힐 선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