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 문화부장
이민주 문화부장

나름 한 신문사의 부장이랍시고 기사 소재를 고심해본다. 시선이 향하지 못한 곳은 어디일지, 어딘가에 토로되지 못한 답답한 마음이 있지는 않을지 눈여겨본다. 놀랍게도 매번 새롭게 소재를 찾는 일이 무색하리만치 매주, 매달, 매 학기 같은 이슈가 논의의 장에 올라있다.

예술인 권리보장법은 또다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태 그래왔듯, 배고픈 예술은 숙명으로 고착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힘든 현실은 ‘먹고 사는 것’ 너머의 고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천에서는 참사가 또다시 되풀이됐다. 재하청으로 내려온 일감에서 여전히 원청의 책임은 찾아볼 수 없고, 그들이 놓여있던 자리에서 다시 누군가는 일을 시작한다.

수많은 당사자가 사안의 불합리함을 논하고, 전문가들이 여러 제언을 쏟아내는데, 같은 문제로 사회는 늘 멈춰있다. 그럴 때마다 혹자는 기사로 사회를 움직여보라고 반문하겠지만, 이는 기자에게 좀처럼 쉽지 않다. 사람들이 당사자성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는 자연스레 도외시되고 잊히기 마련이다.

기자는 기사로 사회의 방향성을 논하며 그 몫을 다한다. 이후에 사회에 시선을 던지는 건 우리의 몫이다. 일상에 널린 문제는 사회의 변화를 일구겠다는 거창한 사명을 가진 이들만이 고심할 수 있는 문제, 나와 무관한 타인의 이슈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이 말하는 어려움은 요원하지 않다. 문화예술계에 ‘문화예술노동’이라는 개념을 정착시키려는 것은, 누군가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구습에 저항하는 일이기 전에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노동의 제값을 인정받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참사는 언제든 우리 곁에 있다. 이천 참사와 같이 죽음이 되풀이되는 것은, 우리와 무관한 이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기에 앞서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에서 실격된 이들이 희생당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 내부의 타자성을 경험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항상 주류에 머물 수 있거나,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편견을 걷어내기 위해 스스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수도, 가까이에서 안위를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는 이들을 마주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권리를 끊임없이 논해야 하는 소수로서의 정체성과, 별다른 설명 없이도 배제당하지 않는 다수로서의 정체성을 함께 쌓아간다. 

자신을 섣불리 주류 혹은 주변과 동일시하지 않는 일은 얼핏 타인의 생처럼 보이는 일들에 시선을 던지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로써 우리는 누구나 자신인 동시에 타자기 때문에 생기는 생의 너절한 흔적을 치우고, 자신 안에 있는 타자성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우리의 시선이 절실한 곳을 향해 있는지를 곱씹어 봐야한다. 기사의 시선 못지않게 우리의 시선이 갖는 힘은 크다. 때론 우리의 시선으로 당사자들의 토로와 전문가들의 제언이 만들어내지 못한 건강한 담론을 형성하고, 요원해 보였던 변화를 거뜬히 이뤄낼 수 있으니. 꿈쩍 않는 사회에 지쳐가는 당사자를 위로하고, 매번 같은 소재로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의 숙원을 해결해줄 수 있으니. 더 나아가 자신 안에 있는 타자와 떳떳하게 마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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