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아이들에게
미래의 아이들에게
  • 대학신문
  • 승인 2020.06.07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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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현(인류학과 석사과정)
최창현(인류학과 석사과정)

조교를 맡았던 수업에서 알게 된 분께 부탁받아 글을 기고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이후 한참 뭘 써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학부 시절 내 졸업 작품 다큐멘터리 얘기를 해볼까? (주제는 패럴림픽과 올림픽을 통합시키는 게 가능할까였다.) 아니면 최근에 대학원 수업에서 과제로 제출한 남성의 ‘여성형유방증’ 이야기? (여성형유방증이 어떻게 남성의 몸을 구성하고, 비로소 병이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 대체 가슴이 뭐란 말인가!) 짧게나마 현장 연구를 수행했던 제주의 해녀 이야기? (제주의 바다는 요왕 할망, 용왕 할머니께서 보살피신다.) 가족의 성이 모두 다른 아이슬란드 이야기? (성(性)과 성(姓)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가 대학원 학업 계획서의 주제였다. 결국은 성(姓)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게 결론이었고.)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거부하고 삶을 개척해 나가는 투명 가방끈 이야기? 아니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매드 프라이드’(Mad Pride) 조직위원회 이야기? 다들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이자,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여러 관계로 맺어진 삶들의 이야기이기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나만을 위한 ‘아크로의 시선’이 아니니 연재를 부탁해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서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를 다양한 삶으로, 이야기로, 관계로 추동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해 써 보자고. 왜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는가?

수없이 많은 관계들 사이에서 우연한 연결의 교차로 내가 태어났다. 태어난 나는 ‘존재’하게 돼 관계의 망에 어떤 파동을 줬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파동은 분명 연결을 다시금 배치하고, 이는 또 다른 연결점이 생기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마치 하나의 악기가 또 다른 악기의 소리를 부르듯, 끊임없는 파동과 연관된 파동의 세계는 생명의 소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소리로 가득한, 가득할 세계를 나는 ‘가능성으로서의 세계’라고 부른다. 하지만 시간의 축이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향해 있는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찰나의 교차점으로만 ‘나’가 존재한다면, 끊임없는 생명의 소리 속에서 ‘나’는 휘발되며, ‘나’는 그렇기에 ‘의미 짓기’의 방식을 통해 이 세계 속에 닻을 내려 고리를 매어 둔다. 그리고 이런 의미들을 이은 일련의 연쇄를 ‘삶’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시간’이라 부른다. 가능성의 세계에는 이런 의미의 연쇄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즉, 내게 이야기란 이런 연쇄들을 확인하고 그것들과 다시 관계를 맺는 하나의 형식이다. 이를 통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삶이 확장되고, 이는 나를 다시 구성하고 다시금 새로이 형성된 찰나의 ‘나’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 경험들을 마주하며 나오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순간 존재하는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의미의 닻을 내려 그들 자신을 구성했을까? 그리고 그 삶은 나와 교차해 어떤 ‘나’를 만들까? 의미로 가득 찬 삶이 나를 흔드는, 확장하게끔 만드는 그런 앎을 얻고 싶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확장, 곧 내 확장은 언젠가 만날 내 아이를 위한 준비이자 배움이다. 내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든,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이후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든 이 가능성의 세계 속에 던져진 것을 최초로 환영하기 위한 내 의례다. 그 아이 또한 결국 커다란 가능성 속에, 관계들 사이에 놓여 있기에 ‘나만의 아이’가 아닌, 세계 속의 아이임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내 의식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필요로 할 때 떠밀지 않고 기꺼이 손 내밀 수 있게 나의 몸과 생각을 만드는 부드러운 숙성의 과정이다. 단 하나 기대하는 게 있다면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함께 눈물지을 수 있는 아이였으면 한다. 그리고 언제라도 기꺼이 평온하고 안온한 눈으로 아이와 세상을 바라보며 ‘원래 그런 것은 없고, 다만 의미의 조각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명의 모습이, 아마 역사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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