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수 강사(서양사학과)
정상수 강사(서양사학과)

2월 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유행하자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막스 베버(Max Weber)였다. 그는 100년 전인 1920년 6월 당시 유행했던 시카고 독감에 걸려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러므로 올해가 그의 사망 100주기인 셈이다. 베버는 근대 사회학의 창시자이기도 하지만 역사학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학을 연구하는 본인은 베버가 역사학자인지 아닌지 생각해 봤다.

역사는 사실(fact)과 해석으로 구성된다. 사실이 정립돼야 해석도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다. 그래서 해석보다 사실이 중요하다. 해석은 역사를 파악하는 시각이다.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보느냐의 문제다. 역사가 개인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석이 나타난다.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 사건을 해석할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역사가가 될 수 있다. 이것을 개인이 소유한 역사관이라고 부른다. 역사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다면 역사관에 차이가 생긴다.

해석을 강조하면 모든 사람이 역사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라는 직업이 존재하며 역사학이라는 독립적인 학문 분야가 존재하는 것은, 역사에서 해석보다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은 사료를 기반으로 존재한다. 이 사료의 중요성을 제시한 역사가가 랑케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사료에 입각해서 ‘있는 그대로’(wie es eingentlich gewesen) 서술할 것을 주장했다. 랑케 이후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를 비판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사실이 발생하는 순간 소멸하기 때문에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베버의 철학적 기반인 신칸트학파에 따라 설명하면,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Ding an sich)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체’를 개념화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버는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과거의 사실을 재현하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역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이다. 이상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료를 통해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다. 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있는 그대로’에 가까워진다. 본인은 이것이 역사학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공부할 때 본인은 사료가 무엇인지 몰랐다. 기껏해야 『삼국사기』, 『삼국유사』 정도가 사료라고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문서 보관소를 알게 됐고 사료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본인의 전공 시기가 19세기 말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사료들은 고독일어 필기체로 작성된 문서들이었다. 이 문서들을 해독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지만 박사 논문을 써야한다는 생각으로 문서 해독에 집중했다.

19세기 이전까지 사료는 유물과 문서였다. 19세기 후반 이후 카메라, 필름, 녹음기 등이 발전하면서 시청각 자료들이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를 재현하는 일이 보다 정확하고 수월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의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는 역학조사이다.

역사학에서 사료를 발굴한 후에 진행되는 작업이 사료 비판이다. 사료가 어떠한 배경에서 작성됐느냐를 알아야 하고 사료의 작성자와 사료의 대상자의 성격, 주변 인간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사료는 대부분 인간의 말과 행동으로 돼 있는데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이런 경우 역사가의 고민이 시작된다. 말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가가 있고 행동을 강조하는 역사학자가 있다. 그래서 이는 역사학에서 논쟁이 되기도 한다.

막스 베버가 학문 생애 초기에 역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는 하지만 그는 역사학자로서의 전문 작업인 사료 발굴과 사료 비판에 대한 성과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막스 베버는 역사에서 사실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치중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학의 광범위한 범위에서는 역사가라고 할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학자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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