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인종, 그리고 슈퍼히어로

슈퍼히어로 서사를 담은 콘텐츠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현대는 바야흐로 ‘슈퍼히어로’의 시대다. 오늘날의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변화하는 시대적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 한 시대에 각광받는 슈퍼히어로의 모습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캐릭터에 열광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기존의 사회적 소수자 또한 슈퍼히어로로 포섭하며 그 저변을 넓혀 가고 있다. 이에 『대학신문』이 현대의 새로운 슈퍼히어로가 재현되는 방식과 그 한계를 분석해 봤다.

 

슈퍼히어로가 걸어온 길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1930년대 대공황 당시 태동한 미국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마블·DC 칼럼니스트 김종윤 씨는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부패가 만연하지만 이를 개선할 공권력이 부재한 가운데, 사람들은 슈퍼히어로라는 시대적 탈출구를 만들어 냈다”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모험 만화를 통해서 힘든 현실을 타개해 줄 수 있는 강한 남성상과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이는 전후 미국의 대내외적인 국가 이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출판 전문지 <기획회의>의 편집장인 김미향 씨는 “초기 슈퍼히어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연합국의 승리를 주도하며 얻었던 이미지를 바탕으로, 미국의 강한 군사력으로 실현된 세계 평화 ‘팍스 아메리카나’의 상징이 됐다”라고 설명했다.

미국 코믹스는 1930~40년대의 ‘골든 에이지’와 1950~70년대의 ‘실버 에이지’,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브론즈 에이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당대 이슈 및 사조 흐름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먼저 골든 에이지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시도가 파괴적인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시기다. 이 시기에는 막강한 힘으로 공동체의 위기를 타개할 영웅이 필요했다.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김세익 연구원은 “골든에이지에 출현한 ‘슈퍼맨’ 등의 슈퍼히어로는 언제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고난을 한 번에 해소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반면 실버 에이지 시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근대 민족국가의 결집력이 약해지면서 사회통합이 무너지고 개인주의와 회의주의적 경향이 만연했다. 김세익 연구원은 “이 같은 현실이 반영돼 실버 에이지 시기의 슈퍼히어로들은 자기 내면을 파고들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등 개인주의적 면모를 강하게 표출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뇌하는 여성 슈퍼히어로의 등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등장한 1980년대 브론즈 에이지는 사람들이 점차 사회 곳곳의 부조리를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사회적인 담론을 활성화하는 등 저항정신이 높아지던 시기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브론즈 에이지의 슈퍼히어로들은 사회 문제를 비판하거나 직접 극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세익 연구원은 “인종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흑인 슈퍼히어로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슈퍼히어로는 동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 준다. 더불어 최근 떠오른 소수자 논의는 슈퍼히어로의 다양한 정체성 반영과 그 재현 방식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냈다. 김미향 편집장은 “21세기에 들어서는 성별이나 인종, 계급 등에 관한 사회적인 논의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됨에 따라 이를 반영하는 슈퍼히어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슈퍼히어로 영화는 단순히 미국의 대중문화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 슈퍼히어로, 넌 네 생각보다 강하기에

새로운 슈퍼히어로의 첫 번째 양상은 여성 슈퍼히어로다. ‘슈퍼맨’, ‘캡틴 아메리카’ 등 남성 중심의 슈퍼히어로 코믹스 세계에 ‘원더우먼’이나 ‘블랙 위도우’ 등의 여성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들 캐릭터는 페미니즘의 영향 아래 탄생했다기보다는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여성을 향한 당대 사회의 기대나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미향 편집장은 “최초의 여성 슈퍼히어로들은 남성 슈퍼히어로를 보조하거나 그들의 이성적 파트너로서 등장하는 경우가 잦았다”라며 그 한계점을 지적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여성 슈퍼히어로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그대로 노출하기도 했다. 

일례로 최초의 여성 슈퍼히어로 원더우먼은 골든 에이지 말기인 1941년,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지나친 폭력성이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미국 사회의 비판에 대응하며 등장했다. 김세익 연구원은 “당시 원더우먼은 남성 슈퍼히어로의 폭력성을 여성성으로 중화하려는 일종의 획기적인 시도였다”라고 평가하면서도 “원더우먼은 인간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는 등 당시 전형적인 사회적 여성성을 답습하거나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랑에 기대는 불완전한 모습을 보였다”라고 지적했다. 그 다음으로 출현한 블랙 위도우는 1964년 미국으로 보내진 비밀공작원으로서 마블 코믹스에 처음 등장한다. 영웅과 스파이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블랙 위도우의 모습은 실버 에이지 슈퍼히어로의 특성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김세익 연구원은 “블랙 위도우는 악의 범주에 속하다가 이후에야 정의의 진영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라며 “이는 여성이 선과 악 사이에서 쉽게 흔들린다는 사회적 편견을 반영한 설정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코믹스를 영화로 각색하는 시도에서 여성 슈퍼히어로가 재조명되고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스토리텔링』(2018)의 저자 이현중 작가는 “여성 히어로의 역사는 여성운동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며 발전해 왔기에 기존의 여성 슈퍼히어로 역시 21세기의 페미니즘 담론의 영향을 받아 재해석되는 경우가 있다”라고 말했다.

먼저 현대의 여성 슈퍼히어로는 사회적 여성성에 종속되지 않고, 작품 내에서도 독자적인 슈퍼히어로로서 활약한다. 이런 지점들은 생물학적인 성에 고정된 사회적인 성을 부여하는 시도를 부정하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논의와 일치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스티스 리그>(2017)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에서 원더우먼과 블랙 위도우의 주체적인 활약상은 달라진 여성 슈퍼히어로의 위상과 더불어 그들이 고정된 여성상에 머무르지 않고 슈퍼히어로 그 자체로 활동하는 모습 또한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평범한 인간에서 가장 강대한 슈퍼히어로로 거듭나는 ‘캡틴 마블’은 이 같은 경향을 분명히 드러낸다. 김세익 연구원은 “영화에서 주체적인 단독 여성 슈퍼히어로로 묘사되는 그의 모습은 페미니즘적 슈퍼히어로의 탄생을 선언하는 중요한 순간이다”라고 설명했다.

여성 슈퍼히어로의 코스튬 변화 또한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진일보했음을 보여 준다. 김미향 편집장은 “현대 여성 슈퍼히어로의 코스튬 변화는 그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배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원더우먼의 과거 복장은 몸매를 부각하던 선정적 디자인이었지만 2016년에 로마 군인식 갑주로 변형된 바 있다. 김세익 연구원은 이를 “기존에 존재하던 슈퍼히어로 캐릭터가 21세기 시대적 담론 중 하나인 페미니즘의 영향 아래 새롭게 여성 주체적인 속성을 반영하게 된 경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슈퍼히어로 묘사에는 한계가 보인다. 그 중 여성 영웅들의 ‘헤리티지적 상징성’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헤리티지적 상징성은 자신이 직접 힘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우월한 존재로부터 그 힘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다. 김세익 연구원은 “원더우먼의 힘이 신들로부터 부여받은 권능이라는 설정은 <원더우먼>(2017)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1940년대 당시 여성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오늘날에도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김미향 편집장은 “사실상 신들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여성이 남성 슈퍼히어로에 비견되는 힘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여성 슈퍼히어로의 코스튬 문제 또한 여전히 제기된다. 과거에 비한 코스튬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성 슈퍼히어로 코스튬의 성적 대상화 문제는 여전하다. 김세익 연구원은 “리모델링된 원더우먼의 로마식 치마 갑주 형태의 전투복은 여전히 전투에 최적화된 전투복이라고 할 수는 없는 형태다”라고 설명했다. 

 

자유, 평등, 정의 그리고 흑인 슈퍼히어로

인종적 특징과 이를 대하는 사회 분위기 역시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빚을 때 고려하던 항목이다. 김세익 연구원은 “슈퍼히어로 코믹스가 백인 영웅주의를 대표한다는 비판에 이어 다양한 인종, 특히 흑인 슈퍼히어로에 대한 요구가 크게 대두되면서 ‘워머신’이나 ‘팔콘’, ‘스폰’ 등의 흑인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초기 흑인 슈퍼히어로는 백인 슈퍼히어로의 조력자의 위치에 머무르는 데 그쳤다. 특히 스폰의 경우 완전한 정의가 아닌 선과 악의 중간적 존재인 ‘안티 히어로’로 묘사됐다. 이에 대해 김 연구원은 “초기 흑인 슈퍼히어로의 안티 히어로적 묘사는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의 결과물로 해석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종 문제와 관련한 폭넓은 사회적 논의가 제기됨에 따라 새로운 흑인 슈퍼히어로 컨텐츠가 등장했다. 김세익 연구원은 그 예시로 1966년에 코믹스에 등장한 ‘블랙 팬서’를 들며 “블랙 팬서로 대표되는 흑인 슈퍼히어로는 현실 세계 속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반영한 모습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블랙 팬서는 실제 역사 속에서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를 상징하는 두 인물에 모티프를 두고 있다. ‘흑백통합’을 주장한 마틴 루터 킹과 ‘흑백분리’를 주장한 말콤 엑스가 그들이다. 블랙 팬서가 처음 등장한 때가 1966년임을 생각할 때 ‘블랙 팬서’라는 이름은 말콤 엑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결성된 미국의 급진적 흑인운동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블랙 팬서의 모습은 마틴 루터 킹에서 따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김미향 편집장은 “온몸에 검은 갑옷을 두르고 악당과 싸우는 블랙 팬서는 인종 차별에 대한 비판과 당시 미국의 인종 갈등과 사회상을 보여주는 슈퍼히어로의 상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역사적 반영뿐만 아니라, 흑인을 향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2016년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블랙 팬서는 조력자를 벗어나 서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독립적 캐릭터로 자리매김한다. 김세익 연구원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처음 영화에 등장하는 블랙 팬서는 다른 슈퍼히어로들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고 있고, 부유하며, 왕족이라는 높은 사회적 계급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라며 블랙 팬서를 설명했다.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가 부족한 교육, 주변의 범죄 환경 등 부정적 편견을 그대로 반영해 만든 흑인 캐릭터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묘사된다. 김미향 편집장은 이런 사실들이 “블랙 팬서가 차별에 저항하는 흑인 영웅을 넘어 인종의 문제를 초월한 완전한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게 했다”라고 평가했다.

덧붙여 김세익 연구원은 블랙 팬서 단독 영화 <블랙 팬서>(2018)가 “두 팔을 가슴에 빗겨 모으는 와칸다 식 인사법을 현실 속에 재현하며 <블랙 팬서>를 기념하는 사회적 현상까지 불러 왔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흑인이 흑인 문화를 기리고 아프리카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장려하는 이른바 ‘블랙 프라이드 운동’(Black pride movement)과 같은 캠페인으로까지 확장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블랙 팬서> 한 편으로 슈퍼히어로에 인종적 다양성이 자리 잡았다고 하기는 힘들어 보인다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이동신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이는 마치 미국 사회에서 한때 인종문제가 흑인 대통령의 등장으로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라며 “슈퍼히어로 작품의 긴 역사를 봤을 때, 한 편의 작품으로 그 역사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라고 지적했다. 김종윤 칼럼니스트 또한 “흑인 이외의 타 인종 출신 슈퍼히어로는 아직까지 전무하다는 점은 슈퍼히어로 콘텐츠가 인종적 다양성을 여전히 제한적인 수준에서 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그 까닭에 대해 김 칼럼니스트는 “오늘날의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 콘텐츠가 자본주의 논리에 크게 종속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슈퍼히어로 콘텐츠가 인종적 다양성과 같은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이윤을 위한 행위이기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이상적인 상황을 추구하는 정도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는 의미다.

영웅이 시대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슈퍼히어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며 변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만나는 슈퍼히어로 대부분은 막강한 힘을 지닌 백인 남성이다. 더불어 슈퍼히어로의 다양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여성과 다양한 인종이 설 자리는 제한적이다.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인 인권운동은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는 ‘백인 남성’과 그들이 이끄는 ‘자본의 논리’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현대 사회가 새로운 슈퍼히어로라는 영웅을 만들었다면 앞으로 영웅은, 우리의 슈퍼히어로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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