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옥(소비자학과 박사졸업)
이화옥(소비자학과 박사졸업)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와 ‘누구와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지도교수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모든 20대의 고민이 대개 이 한마디로 정리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2011년 12월 18일로 기억된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입학통지서와 함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학부 내내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이다. 달리는 공항버스에서 처음 본 서울의 모습은 예상보다 평범해서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관악캠퍼스의 첫인상은 고즈넉해서 기대 이상으로 좋았었다. 특히 셔틀버스가 다닐 정도로 널찍한 캠퍼스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이어서 시작된 대학원 생활이 모두 내 마음 같지는 않았다. 첫 일 년은 방법론 수업을 제외한 나머지 수업에서 60~70% 정도의 내용만 이해할 수 있었고, 논문 읽는 방법조차 익숙하지 않은 채 매주 과제를 제출해야 할 뿐 아니라, 학기말에는 보고서까지 써야 하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인간관계에서도 어려움이 컸다. 중국보다 선후배 사이에 ‘격’이나 ‘예의’를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는 무조건 어느 정도의 격식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선후배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좀 더 편한 관계를 맺어도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아직도 윗사람, 아랫사람에 대한 적정한 ‘선’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관악에서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그중 하나가 인생의 롤모델을 만난 것이다. 20대 초반 머릿속으로나마 어렴풋이 그리던 성공한 여성의 모습은 직장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로서, 가정에서는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만능 엄마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는데, 우리 과 교수님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셨다. 인생의 롤모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행운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도전의 가치를 터득한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인생을 안부취반(按部就班)*하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이에도, 결혼에도 얽매이지 않고, 심지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선후배들을 보며 도전이 곧 도약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대학원 생활에 점점 적응해 나갔고 석사를 졸업할 때 즈음, 나는 관악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그와 함께 서울의 구석구석을 신나게 누비고 다녔고, 첫인상과는 달리 서울은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낭만의 도시였다. 아마 이때가 대학원 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나는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자연스레 한 남자의 아내가 됐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인 ‘누구와 살 것인가’가 관악에서 결정된 셈이다. 

외국에서 유학생으로 박사 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쓰면서 출산과 양육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초심과 열정을 잃은 것은 아닌지 좌절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힘든 순간 항상 손 내밀어 일으켜 세워 주신 지도교수님과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이끌어 주신 지도위원 교수님들, 늘 가족같이 나와 함께 해 준 연구실 식구들, 그리고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부모님 덕분에 나는 무사히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나는 이제 다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다.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20대의 나는 어디든지 훌쩍 떠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가족과 함께이기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그러나 8년이라는 관악에서의 시간이 나를 전문인으로, 지성인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에 두렵지는 않다. 그리고 이제 유학생이 아닌, 사랑에 빠진 여인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마주하게 될 서울의 모습도 기대된다. 

오늘도 누군가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그리고 누구와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고 관악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관악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성장과 발전, 그리고 해결의 장이 되길 바란다. 이쯤 되니 연구실 선배들이 하나같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지도교수님과 연구실이 친정마냥 그립다고. 나도 이제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벌써 관악의 따뜻함이 그립다.  

*안부취반(按部就班): 일을 일정한 순서와 절차에 따라 진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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