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교수 인터뷰 | 정년을 맞이한 교수들의 회고와 후학에게 전하는 말

박병주 교수(의학과)
박병주 교수(의학과)

지난달 16일 연건캠퍼스 연구관(2동)에서 박병주 교수(의학과)를 만났다. 그는 40여 년간 예방의학자로서 △국제약물역학회 △국제백신연구소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 △대한보건협회 등에서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왕성히 활동해 왔다.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반긴 그는 “아직 정년이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40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라며 정년을 맞이하는 소감을 밝혔다.

Q. 어떻게 예방의학을 전공하게 됐나?

A. 본과 4학년 8월에 졸업시험을 위해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예방의학 실험실 조교였던 한 선배가 예방의학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개별 환자 진료보다는 국가의 공중보건 수준을 높이고 질병의 원인을 찾아서 예방하는 일이 더 재밌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제안으로 인해 예방의학을 전공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3개월 후 대학원에 진학해 예방의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사실을 부모님께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임상의가 아니라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는 학자가 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고 예방의학자가 되더라도 언제든지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거냐고 내게 물었다. 당시 나는 “그럼요. 의사 면허증이 있으니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결국 직접 환자를 진료하지 않는 예방의학자로 남아 있다. (웃음)

Q. 지난 6월 ‘질병관리청’으로의 승격이 확정된 질병관리본부(질본)가 ‘질병예방관리청’으로 승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A. 질본은 2003년 사스(SARS) 유행 이후인 2004년에 설립됐다. 기존 감염병 방역 담당 기구였던 국립보건원은 질본 산하 국립보건연구원으로 편입됐고, 국립보건원장이 1급 공무원이었던 반면 질병관리본부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게 됐다. 하지만 이후 신종플루, 메르스(MERS)를 겪으면서도 질본은 독자적 예산권·인사권을 부여받지 못했다. △질병 예방 △관리 △방역을 위한 제도와 정책의 틀을 아무리 잘 짜더라도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건 사람이다. 따라서 질병 전문가가 인재를 선별해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위 기구인 보건복지부가 질본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역학조사관이 계약직 대우를 받는 등의 상황에서는 적절한 인재를 선발하는 것도, 선발된 인원이 노력에 걸맞는 대우를 받기도 어렵다. 따라서 이번에 질본이 승격될 때엔 독자적 인사권·예산권이 보장돼야 한다. 또한 기관의 이름에는 그 조직의 존재 이유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담겨야 한다. 감염병 유행 이후의 대처도 중요하지만, 발병 이전에 예방하고 방역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이런 이유로 ‘질병관리청’이 아닌 ‘질병예방관리청’으로 명명하기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Q. 40여 년 동안 학교에서 강의를 해왔다. 그중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면?

A. 내 지도 학생 한 명이 본과 4학년 때 찾아와서는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며 졸업하고 인턴을 하지 않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깜짝 놀라서 무슨 소리냐며 말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 학생은 1년간 여행을 다녀온 뒤에 인턴을 하고 산부인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쳤다. 그 후 산부인과 의사가 됐고 나는 그가 계속 의사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8년 정도 전에 ‘빅데이터 포럼’ 강연을 하기 위해 관악캠퍼스에 방문했다가 그 학생을 만났다. 알고 보니 의사 일을 그만두고 예방의학을 공부해서 모자보건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보건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파란만장한 삶이라 생각했다.

박병주 교수는 후학에게 “좌고우면과 우왕좌왕의 시간이 없을 수 없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면 전력을 다해 그 분야에 뛰어들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전했다. 퇴임 후의 계획에 관해 묻자 그는 “노 스케줄(no schedule), 노 보스(no boss), 노 허리(no hurry), 노 스트레스(no stress)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앞으로도 예방의학자로서 활동할 생각이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기자를 혜화역까지 바래다줬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는 혜화와 함께한 오랜 시간의 흔적이 스며 있었다.

사진: 김별 기자 dntforget@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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