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코로나를 알고 있느냐. 그것은 네가 다니는 곳이 어디든 존재하고 너를 노리고 있단다. 그것이 너를 잡아먹는다고 할지라도 젊고 건강한 너는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할 것이고 그들을 너와 멀어지게 만들 게다. 그러니 몸가짐을 잘하고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거라. 아들아, 코로나를 알고 있느냐. 너는 아직 모를 게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나는 몸을 한껏 더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올 초부터 전 세계를 집어삼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는 사회 각계각층의 생활 양식을 변화시켰다. 추운 겨울날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만 내민 채 거리를 거니는 범인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고,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로 얼굴과 얼굴을 맞댄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여름 삼복더위를 마스크와 함께 지내야 할 줄은, 올 초에 미뤘던 약속을 여태껏 성사시키지 못할 줄은 몰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길어지는 코로나19 사태에 지레 겁을 먹었던 나는 마스크 때문에 땀띠가 난 얼굴로 ‘코로나19, 서울대 스케치’ 특집 기사를 준비했다. 

학교 구성원들이 코로나19로 인해 겪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기성 언론이 내놓은 무수히 많은 문제와 부작용들을 살폈다. 기사를 읽고 자료를 찾아볼수록 막연했던 걱정과 우려는 늘어나다 못해 더욱 첨예해졌다. 이는 타인과 접촉하는 일신의 안락과 안위에 대한 걱정을 넘어서 타인을 향한 불안과 염려로 확장됐다. 그러다 보니 취재원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면서도 연구실, 사무실 등의 노동 현장의 분위기와 안전을 살폈고 내 불안감이 그들에게도 전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늘 인터뷰 말미에 취재원들이 기자의 불안을 덜어내 주기 위해 “그래도 여긴 안전한 것 같아요”라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렇게 취재원으로부터 인터뷰에 대한 답변과 내 불안에 대한 위로를 동시에 받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들이 머리를 움켜쥐고 실험 보고서를 작성하는 듯 보였고, 사무실에서는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결재 서류를 전달하고, 회의실에는 마스크를 쓴 상태로 회의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게 모든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걱정해온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코로나19를 무던하게 극복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일상이 돼 버린 그들에게 내가 비췄던 걱정과 불안은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저는 코로나를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마따나 그 무서운 것은 저를 노리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네요. 그렇지만 저는 봤습니다. 제 친구들, 선배들, 선생님들, 그리고 당신과 같이 가족을 위해 일하고 계신 분들은 그것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선 안될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코로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흔들지언정 꺾을 순 없습니다.”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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