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 교수(조선해양공학과)
김용환 교수(조선해양공학과)

영어에 ‘Lack of nuance’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뉘앙스의 부족’이다. 뉘앙스는 일반적으로 색, 의미, 모양이나 형상, 혹은 소리 등의 미묘한 차이를 의미하므로, 뉘앙스의 부족이라는 것은 그런 미묘한 차이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직역된다. 하지만,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이 말에는 더 깊은 뜻이 있다. 지나치게 단순화돼 자세한 부분을 놓치는 경우, 혹은 좁은 시각이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이런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논리적 토론을 통해 의견을 도출하기보다 자신의 주장만 하는 사람, 좁은 생각으로 여러 가능성이나 다양한 의견을 잘 수용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뉘앙스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한다. 

뉘앙스가 부족하면 토론과 논리가 사라지고 생각의 다양성이 점차 사라진다. 논리적 생각에 따른 결정보다 자기중심적 결정이 우선한다. 마음의 문이 좁아 본인의 생각 영역을 벗어나기 힘들며, 새로운 것에 대한 학습이 힘들어진다. 이런 이유로 젊은 사람들은 뉘앙스의 부족을 더욱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많은 것을 접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 가는 시점에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어야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뉘앙스가 부족하거나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생존방식은 갈등 조장과 소위 ‘패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을 내 편과 반대편으로 양분화하기 위해 선동적 방법을 사용하고, 논리적 토론을 통한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과 진영 논리를 앞세워 사람들을 자극한다. 내 편이면 무조건 옳고, 반대편이면 무조건 틀린 것이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려 한다. 자극적인 논리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때로는 사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최근 한국 사회는 뉘앙스가 많이 부족한 모습이다. 어쩌면 뉘앙스가 상실된 사회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동안 이런 모습은 정치 분야에서 지나치게 두드러져 왔다. 다양한 정치 철학에 기반하는 건전한 논쟁보다 상대방을 비방하는 고성과 파행의 모습은 국민에게 식상할 정도로 오래됐다. 그런데 뉘앙스의 부족은 이제 우리나라의 전반적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진보와 보수, 빈자와 부자와 같은 전형적인 양극화 문제들이 많이 심화해 있고, 경제, 사회, 교육 분야에서 의견의 대립각들이 첨예하다. 요즘의 언론 토론회나 SNS 댓글들을 보면 조건 없는 찬성이나 반대, 심지어 심각한 비방으로 가득하다. 젊은이들은 금수저와 흙수저로 양분돼 있고, 최근 논란이 많은 부동산 문제에서는 임대인과 임차인을 마치 대립 관계로 보는 듯하다. 이런 양분화된 시각과 주장은 타협이나 화합보다 사회적 갈등의 가능성을 높인다. 

최근 비슷한 시점에 발생한 전임 서울시장과 전임 4성 장군의 장례 과정에 나타난 무조건적 비난이나 옹호는 뉘앙스가 부족한 현재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이들의 공(功)과 과(過)를 차분히 평가하고 인정하는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중국공산당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오쩌둥에 대해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는 평가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 평가가 그 정확성을 떠나 마오쩌둥과 정치적 노선이 달랐던 덩샤오핑의 평가였음은 생각해 볼 일이다. 무조건 옳고 그름으로만 구분하려 하지 않고 여러 사실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판단과 평가가 이뤄질 때 우리 사회는 더욱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된다. 그런 판단과 평가는 미세한 차이일 수 있으므로, 뉘앙스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어야 더욱 건설적인 사회가 된다. 

현재 우리 주위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뉘앙스의 부족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정보에 대한 지나친 편식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현재의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들이 아직은 다양성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지 않을까. 이런 사회적 현상이 우리나라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성장통(成長痛)이기를 바라지만, 최근 우리 사회의 양분화 경향은 우려할 수준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싶다. 

국가적으로 보면 특히 젊은 세대의 뉘앙스 부족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기 때문이다. 사회가 건설적이고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시각의 폭이 넓고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인지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이 많아져야 한다. 철학자 니체는 인생 최고의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 뉘앙스의 기술이며, 젊은 사람이 ‘예, 아니요’ 식으로만 사람이나 사물을 다뤄 무조건적 숭배와 멸시를 하는 것에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미래에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뉘앙스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편협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주기를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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