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외출할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맨발로 아스팔트를 디딘 것마냥 어색하다.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지내오는 동안 우리의 일상적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음을 문득 자각하곤 한다.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이 전염병의 위력을 새삼스레 느끼며 여름의 끝자락을 맞고 있는 요즘이다. 

비대면, 격리 생활이 수반하는 단절의 경험이 사람들의 삶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반년 동안 모종의 경계가 뚜렷해진 것만은 분명히 느낀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다 보면 마스크 안팎의 공기가 차단돼 있어 내 코와 입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럴 때 뚫을 수 없는, 뚫어서는 안 되는 어떤 단단한 벽의 존재를 느낀다. 너무나 답답하지만, 그 벽은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므로 그 경계를 두고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어느 순간까지 유지되던 미약한 유대감마저도, 피해가 오가기 시작하면 아예 단절되고 만다. 모두들 몸을 힘껏 웅크리고 자신을 보호하는 벽을 공고히 하느라 그 어떤 영향도 주고받을 수 없는,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부재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어쩐지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무기력한 외톨이 대학생’ 이미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꺼리기에 사람 만나기를 무서워하며 그늘진 곳에서 몸을 사리고 있는 모습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 결코 같을 수 없는 개개인들이 교류하다 보면 어떻게든 일그러짐의 순간을 맞게 되는데, 다소 예민한 성정을 지닌 나는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섣부르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무섭다. 그럴 때면 차라리 거울 같은 사람이 되어 상대방을 투명하게 비출 뿐, 그 어떤 몸짓이든 주고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태도는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격이다. 개인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방편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타자와의 소통을 포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를 보고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 있다. 그래, 스스로도 그런 모습이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스운 게 다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을 포기할 각오로 방역에 철저를 기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일지 떠올려 보라. 오늘날 마스크를 쓰는 것이 신발을 신는 것처럼 당연해진 까닭은 우리가 매일 100%의 확률로 전염병 확진자와 접촉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당신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경솔한 마음이 아픔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태도다. 가끔 마스크 안에서 질식할 것 같다고 느끼더라도 마스크를 벗어 던질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너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벽을 단단히 세워둔 것이냐 묻는다면, 반드시 하나의 답으로 귀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어떤 ‘책임’ 때문이라 답할 것 같다. 경계를 보유한 존재들이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내가 받은 상처를 책임지지 않았던 사람들, 나 역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에 무감했던 날들이 무게 추처럼 마음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닐 테다. 각자의 감정, 말과 행동의 주인은 자신이고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에게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눈에 들어오고 각자의 외벽이 보수될 필요가 있음을 자각하면 그렇게 우리가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많은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이 오가는 시기다. 경계를 깨부수고 알 수 없는 분노를 서로에게 쏟아내는 광경을 목도하며 나는 나의 감정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지 자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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