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말이 검은 상자에 담겨 옮겨진다면

박현민

(화학생물공학부·16)

우리의 말이 검은 상자에 담겨 옮겨진다면

말하는 순간부터 해질녘 그림자로 낮아진다면

 

모노톤의 옷을 입고 자막같이 발화하며

연사는 말을 아끼고

 

옮겨지면서 눈이 왔던가 비가 왔던가

이곳저곳 사라지는 상자들을 모아

천연히 멀어지는 리어카는 어떤 색채였던가

 

인적 없는 길은 질척이고

덜컹거리며 포장이 풀어지면

 

닿을 수 없는 말들이 흐르고

말들이 말들을 흐리고

희미하게 길을 번지고 

 

연사가 말을 멎는다 

상자들이 가지런히 무너진다

 

지면 위로 동그랗게 눈뜬 글자들이 떨리고

 

 

전칠수 씨의 시차

박현민

(화학생물공학부·16)

전 씨는 잠을 잘 때면 화난 듯이 굳어진 모습으로 잔다 편치 못함이 그대의 가장 편안한 얼굴이라는 듯이 버석거리는 커튼을 두 팔 모아 치며 처음으로 잔 침대를 생각한다 자기 키보다 두 뼘이나 모자란 철제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두 발이 다른 곳으로 전송된 기분이었다 그런

어긋남을 생각한다 두 발보다 온전하지 않은 두 손도 분명 돌아오는 중이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시계 위로 한 팀이 먼저 도착했고 다른 팀은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 시차는 언제 보정될 것인가 새벽 노동도 가리지 못한 햇볕에 떼인 석기와 같은 안면근으로

눈을 감는다 단단한 이안류가 밀려온다 그것을 잡을 수 없다 눈치챈 순간 모르는 섬에 표착한다 그렇다면 나머지들은 어디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가 누군가의 잠에서 섬이 되고 나무가 되어 뱃놀이 온 가객에게 즐거운 손 흔들고 있는가 지금이라면 쩍쩍 갈라져 있을 그것들을 생각하면

암석 같은 슬픔이 쏟아진다 내게는 안녕을 고할 손이 없다! 시각이 정오를 넘겨도 파도는 점점 깊어지고 전 씨는 다시 먼 곳으로 뱃놀이를 떠난다

 

 

밤의 정원

유푸름

(철학과·19)

사랑받지 못할 때는 늘 맨발이었다 창밖으로 목을 뻗고 비릿한 물 냄새를 맡으며 울었다 여느 밤 누런 블라인드 뒤편에서 나의 그림자, 흔들렸다 신음조차 불구여서 입술 주위를 절뚝거리다 우리는 백일몽이 조산(早産)한 악몽들 열꽃 같은 문장을 품은 채 핏기없는 이불로 쓰러지고 싶었다 사랑하는 나의 남빛, 아무도 날개를 틀어쥐지 않았는데 쓸쓸함을 달아나지 못하다

꿈에서 나의 빈한한 바다, 망막에 안개 낀 숲이 맺혀 있다 헐거운 도망자들 가엾은 눈과 입과 귀가 내부로 열린 채 멀어버리다 비밀을 허락한 침엽수림이 날카로이 호흡한다 우리는 시리게 헛구역질하며 침잠하는 과오의 사원으로 검거나 없는 무릎과 손이 헐떡이는 심장을 파고들 수 있다면 당신의 실루엣은 자꾸만 세이렌처럼 노래한다 칠이 벗겨진 하얀 제단 아래 우리는 무화과 향 분수에 입을 담그며 사랑을 야기하는 연민을 기도하고 허나 외마디 비명, 지르는, 빈터 뒤틀린 사지로 땅을 짚으며 내달려도 아직 조롱이 부족하다 검은 동굴 속에서 금을 고통으로 바꿔주는 여자가 끈적인다 그의 품속으로 제의를 치르러 가렴 밤새 오로라 쪽으로 추락하면 흥미를 잃기 전까지만 목을 조를 거란다 가래 섞인 숨소리 허덕대는 폐 날아가는 짙푸른 새들 침입을 허용치 않는 숲이 다시 빗장을 잠근다 너 때문에 치욕이 멎지 않아, 어느새 당신과 나는 바다의 포말 밖에서 몸서리치며 손잡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남빛 우리는 박탈과 폐기를 반복하는 유년의 영혼들 아직도 과육이 흐르는 침대 위 당신의 문장으로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한때 뺨을 어르던 눈물에는 소리가 없다 달뜬 밤을 도망쳐, 불구인 몸의 검은 물감이 바스러져 떨어질 때까지 영영 사랑해서 죽이고 싶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애쉬와 투명

*희영에게

유푸름

(철학과·19)

마음 둘 곳이 없다

전화를 붙든 손

흐린 숨으로 침묵하다

말이 어려우면 웃음이 헤프고

 

열매가 벌어지던 교정

나, 가난한 폐렴에 걸리다 

밤의 등허리에 서서 

필명은 애쉬라고 소리치다

음가가 없는 이응 쉬이 흘러나가는 시옷

신처럼 이드*를 섬기던 시절

립스틱보다 루즈를 마찰음보다 파열음을 

안위보다 전위를 사랑하였으나

차마 심장 박동이 미약하여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울어보지 않다

 

아름다움은 비틀거림에서 태어난다기에

가냘픈 덫으로 목을 옥죄면

향기에 질식함을 쓸쓸히 이해할 뿐

파르라니 떠는 숨결도 고작

허파의 밑바닥으로만 꽃피게 되다

 

우리는 스무 살이야!

네가 빗속에서 건네준 하바리움*

나의 처소에 하얀 수국이 흐드러진다

파리한 꽃잎의 함의가 오래 부유한다

 

이제 치욕 아닌 것을 애증하여도

통속 아닌 것을 망각하더라도

 

눈감기 위해 투명해졌으니

슬픈 전회를 어루만지고

창백히 공전하는 

나를

 

*이드: 리비도의 근원

*하바리움: 특수 용액이 담긴 병에 식물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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