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승훈 교수(경영학과)
석승훈 교수(경영학과)

왕관을 쓴 바이러스가 우리의 목숨줄을 조여 오고 있다. 그 바이러스들은 생명과 공존에 관한 모순을 드러내 보여주며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바이러스의 인문사회학적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바이러스들은 무엇보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바람의 흐름과 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연결된 길을 통해 이동한다. 길이 없으면 새로 만드는 재주도 있다. 그렇게 그들은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비록 그 과정이 그들이 기생하는 숙주 세포에 큰 피해를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들로 인해 세포가 처참히 파괴된다면 결국 바이러스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은 혼자서 이동하기보다는 무리를 지어서 이동한다. 최소한 그들은 혼자서 다닐 때 얼마나 나약한지 터득하고 있다. 숙주는 그 바이러스들에게 성문을 열어 주고 항복하는 마냥 나약한 바보들은 아니다. 숙주와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탐색과 접전으로 서로를 물리치고자 투쟁한다. 바이러스들은 조직적인 공격으로 숙주를 무력화시킨다. 비록 바이러스들은 자신의 생존 방식이라고 위로할지 모르지만, 무리 지어 주위를 황폐화하는 행동은 숙주 세포에 있어 염증을 유발하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다. 왜 이 바이러스들은 이토록 탐욕스럽게 주위를 정복하려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그들이 머리 위에 쓰고 다니는 왕관이다. 그들이 왕관을 탐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아름답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관이 내포하고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들은 그 왕관의 뾰족한 끝으로 우리의 세포에 침입해 그들의 분신을 주입하고 마침내 세포를 오염시켜 곪아 터트린다. 사실 세포를 오염시키기 전에 이미 그들은 각자가 권력을 탐하기 때문에 서로를 찌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바이러스들을 모두 같은 종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수많은 변종이 존재하고, 지금도 스스로 변이한다. 사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해롭지 않고 별다른 문제 없이 우리와 공존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악질적인 변종들이다. 이들은 세포의 면역력을 교묘히 무력화하며, 다른 바이러스들에게도 희생을 강요한다. 그들은 더욱더 찬란하고 장엄한 왕관을 쓰고자 한다. 다른 바이러스들을 그저 자신의 왕관을 장식하기 위한 희생양이나 무시해도 되는 열등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들은 머리 위에 얹힌 왕관의 반짝임을 마치 자기 자신인 줄 착각한다. 그들은 유난히도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다. 그 반짝거림을 위해 동료 바이러스든 세포든 닥치는 대로 갉아 먹는다.

그들은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 분열함으로써 세력을 키우고 번식한다. 처음에 그들을 세포의 일원으로서 받아 줬을 때, 그들은 주위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 수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도 한동안 별 탈 없이 조용히 지냈었다. 그들이 조용히 지낼 때 세상은 그런대로 평화로웠을 것이다. 그들은 세포의 일원임을 감사히 여겼고 서로를 경외하고 존중하며 공존했다. 그러던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점차 탐욕스러워지면서 세포를 공격하는 것을 그들의 업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직화해 세포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공존과 평화보다는 폭력과 탐욕을 선택했다. 그들의 폭력성은 불확실성을 먹고 자라며 탐욕은 복리로 증가한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세포를 공격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의 머리 위 왕관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탐욕스러워서 왕관을 쓰는 것인지, 아니면 왕관 때문에 탐욕스러워졌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이 바이러스들이 지속해서 황폐화하는 것을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우리도 그들처럼 조직화하고 역량을 집중해 그들의 공격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흘러가다가는 모두의 공멸이 조만간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들을 제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바이러스라 부르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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