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경 강사(미학과)
윤혜경 강사(미학과)

매체이론가인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1970년대 후반, 현대 사회를 속도가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빨리 빨리’가 경쟁 요소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비릴리오의 속도에 대한 주목은 꽤나 흥미롭다. 그런데 비릴리오의 속도에 대한 주목은 특정 사회, 특정 문화 현상보다는 현대, 21세기라는 시대적 특성과 관련해서 생각해 봄 직하다. 

비릴리오는 속도가 지배하면서 ‘피크노렙시’(picnolepsie)가 강화된다고 봤다. 피크노렙시는 비릴리오의 조어로, ‘빈번한’을 뜻하는 희랍어의 ‘picnos-’와 ‘발작’을 뜻하는 ‘lepsie’를 합성한 것이다. 비릴리오의 피크노렙시는 빈번한 발작, 의식의 중단 현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간질과 흡사하다. 비릴리오는 피크노렙시 현상을 겪은 당사자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고, 의식에 없는 그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몸이 시공간을 점유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

비릴리오는 피크노렙시에 대한 사례로 말년의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를 조명했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 시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제작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열여덟 살이었던 1924년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이미 백만장자가 됐다. 영화 제작자, 감독, 조종사, 공학자, 투자자로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휴즈는 생애 말년 약 10년간 라스베이거스 호텔에 칩거하면서 은둔자로서 기행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고, 나체로 생활하며, 세상과는 전화로만 소통하고, 칩거했던 호텔 방에서 온갖 빛을 차단한 채 자신이 제작했던 고전 영화를 수백 번 반복해서 보는 삶이었다. 휴즈의 몸은 60대의 생물학적 나이, Desert Inn의 펜트하우스라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에 점유됐지만, 휴즈의 의식과 지각은 스크린의 이미지에 조율됐다. 휴즈에게서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시간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다. 인간에게 천문학적으로 주어진 시간, 물리적인 시간을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비릴리오는 자동차, 비행기, 전화와 같은 매체들에 의해 공간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소멸하게 됐다고 봤다. 그리고 시간은 균등하고 동질적인 시간 대신 각자가 창조하는 시간으로 전환됐다. 현재의 시간의 특성은 실시간이다. 물리적인 공간의 소멸, 물리적인 시간의 소멸은 휴즈의 사례에서처럼 몸의 분리로 이어진다. 이 현상은 실시간이 지배하는 현재 더 강화된 듯하다. 내가 물리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보다 내가 넷 상에서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정확히는 내 의식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컴퓨터와 나의 인터페이스는 내 손가락이지만,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저편과의 상호작용은 의식과 의식의 교환에 의해 이뤄진다. 이 점에서 뉴미디어의 시대의 특징인 인터렉티브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렉티브는 감각의 전환, 촉각적 특징(스크린에 터치하는 식의), 몸의 생리적 반응 등과 함께 이야기되지만, 정보 교환의 관점에서 보면 달리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정보는 손에 들고 펼치고 넘기는 종이 매체, 그리고 종이 매체를 제작하고 진열할 물리적인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보가 비물질적인 공간을 통해 전파되면서 물리적인 시간의 격차가 사라진다. 텔레비전을 쌍방향 매체, 실시간 매체라고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시청자의 반응 속도와 현재의 넷 상의 뉴스 반응 속도는 비교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슈가 확산되기까지 물리적인 시간, 물리적인 공간의 주파가 필요했다. 현재는 물리적인 시간을 주파할 필요도 없어졌을 뿐더러, 물리적인 공간은 사라졌다. 실시간 정보는 정보 수신자의 폭발적인 반응을 동반한다. 반면, 그 이슈는 제한적이다. 

논쟁은 여러 가치관의 충돌을 담고 있기 때문에 비유적인 의미에서 전쟁이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과 공간이 해체되고 시간의 개념이 변화된 현재 비유적 의미가 아닌 문자적 의미에서 우리는 전쟁 중에 있는 듯하다. 시대의 변화가 가속하는 한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실시간 정보를 수신하지 않는 것, 자발적으로 휴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보가 특정 발신자로부터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제공되는 지식으로만 형성되지 않고, 뉴스 댓글, 커뮤니티의 담화, SNS의 짧은 메시지들이 정보로서 함께 기능하기 때문에 이조차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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