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호(경제학부)
손세호(경제학부)

경제학도로서 꼭 듣고 싶은 과목이 있었다. 마침 그 과목이 졸업학기에 개설됐다.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기필코 해내고 싶어서, 교수님께 질문해 가며 겨울방학 내내 교과서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수강신청에 실패해 버렸다. 낭패스러웠다. 초안지를 냈지만 그것마저도 떨어졌다. 듣고 싶은 학생이 나 말고도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강의실 사정으로 청강마저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물이 났고, 정말 속상했다.

감사하게도,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담당 교수님은 최선을 다하셨다. 교수님의 노력 끝에, 원래 배정된 인원을 50%나 초과하여 이 과목은 학기를 시작했다. 나는 거의 마지막으로 구제됐다. 하지만 결국 배를 타지 못한 친구들도 여럿 생겼다.

다시 낭패감을 느낀 것은 학기 중반이었다. 어느 날 eTL에서 인원이 당초보다 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몇 명의 학생이 수강신청취소, 속칭 '드랍'을 한 것이다. 이들이 수강신청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초안지에서 탈락한 어떤 친구들은 수업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나 또한 이 수업을 못 듣게 됐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아찔해졌다. 드랍했던 그 몇 명이 학문적인 책임감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글은 우리 수업에서 드랍한 몇 명을 고발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이번 계기로 돌아본 것은 나 자신의 일이었다. 태생적으로 포기를 싫어했던 1학년의 나는,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아집이 있었다. 드랍은 '학문적 자살'이라고 여겼다. 그 열정만큼 치밀하고 치열하게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획이 틀어졌을 때, 고학년이 된 나는 약아진 탓인지 다른 선택을 했었다. 자리를 꽉 채워 들어간 타 학과 전공, 그 중간고사에서 중위값 아래의 성적을 받았을 때, 나는 두려워서 결국 드랍을 선택했다. 유학을 가려면 학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혀 상관없는 과목에서 낮은 성적을 받아 경제학을 하는 학문 인생에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주객전도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 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반드시 들어야 했던 다른 학생에게 자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사정이 있는 학생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업에 들어오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드랍하기 전에 이들을 떠올렸다면 부족하나마 끝까지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르겠다. 변경기간 종료 전이었다면 꼭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재고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부끄럽다. 책임감도 배려심도 없던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업내용 이해가 미진할 때 드랍이라는 옵션을 사용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득이 실보다 더 클 것이고, 분명 '경제적인' 선택이다. 어떤 친구들은 모든 학점을 채운 다음 중간고사를 보고 끝까지 가져갈 것을 '선별'하겠다고 했다. 어느 과목에서 성적이 잘 나올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의 자원, 그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한정돼 있다. 같은 수업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그저 흥밋거리에 불과하나 누군가에게는 소망 자체일 것이다. 마냥 넓혀 놓는 선택지의 이면에는 빼앗기는 사람의 눈물이 있다. 이것은 비단 수강정원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더 크게 보면 대학생 수도, 학계에 남을 수 있는 인원도 제한돼 있다. 서울대생이라는 지위 또한 당연히 그렇다. 한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함으로써 배울 기회를 상실하는 다른 학생이 있다. 보이지 않던 그들을 만나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학교를 떠날 때에야 했다. 방황이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나태에는 얼굴이 붉어졌다.

학문의 길을 계속 걸어가려면 필연적으로 생존 경쟁을 해야 한다. 운 좋게 살아남았을 때 할 수 있는 배려는, 우리만큼이나 원하는 것을, 우리에 의해서 좌절당한 이들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당장 개인적으로 손해가 되는 어떤 일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정말 고대했던 것일지 모른다. 이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이들이 책무를 면탈한다면 그 분야를 연구할 사람은, 또는 그 일을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승자의 방만함은 찬탈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책임과 배려는 쌍대관계*(duality)에 있다.

졸업식을 앞두고는 1학년의 나와 마주앉는 시간이 많았다. 모든 걸 잡으려고 계획하고 애쓰던 그 앳된 모습이 보인다. 선택 가능한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예산집합이 커질수록 효용함수의 최댓값은 그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합리성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쌍대성의 도의적 무게는 어림잡아도 무겁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어떤 것을 나보다 더 잘하거나 더 필요로 하는 이를 발견한다면, 그에게 기회를 양보하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서운함은 언제나 남겠지만 말이다. 열정과 욕망이 뒤섞인 순간에 그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일테다. 따라서 사전(事前)적으로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데에는 특별히 남다른 관찰력과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학부시절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름대로 내려 본 사랑의 정의는 바로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경제학도인 나의 생각이 전혀 경제학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경제학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듯이, 경제적 사고 역시 삶의 여러 가지 덕목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거칠게 말하면, 경제학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양적인 '성장'밖에 없다. 질적인 측면에서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비경제적 선택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이렇게나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는, 선택한 학문에 대한 책임감과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사회의 품격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점을 학부시절의 경험과 공부를 돌아보며 매우 강력히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현실 속이지만, 사회전체의 기회비용을 걱정하는 학우들이 많아지길 간절히 바란다.

 

*쌍대관계: 주어진 비용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 효용을 나타내는 '간접 효용 함수'와 효용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을 나타내는 '지출 함수' 사이에 존재하는 수학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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