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온역, 나병, 두진으로 살펴보는 조선의 전염병 대처 방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한국에 유입된 지 반년이 넘어갔다. 코로나19 백신이 아직 개발 중인 상황에서 감염자는 계속 늘어가고, 사람들의 공포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명확한 치료법도, 예방법도 없이 전염병을 맞이한 현재의 상황은 마치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조선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전염병을 극복해 왔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들에게 본받을 점은 분명히 있다. 이에 『대학신문』은 간추린 조선의 전염병사를 통해 전염병을 슬기롭게 이겨냈던 선조들의 지혜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은 이전의 국가들에 비해 실질적으로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국가 주도의 의료 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온역’에 대한 조선의 대처로 살펴볼 수 있다. 온역은 급성 유행성 열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조선 건국 전부터 한반도에 뿌리내렸던 전염병이다. 『고려사』에도 숙종 5년(1100) 제사를 통해 온역이 제거되기를 빌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조선 정부는 전염병이 발생하면 먼저 환자들을 차단 및 격리하고, 이후 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의약품과 의서를 전국에 보급했다. 온역의 대처 역시 비슷한 순서로 진행됐는데 『신찬벽온방』(1613)과 같이 왕의 명으로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거나 『본문온역이해방』(1542) 등 현존하는 효과적인 의서를 전국에 배포했다. 두 의서는 온역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감염자를 치료하는 방안뿐 아니라 치료자의 감염 방지 방안도 서술하고 있다. 『신찬벽온방』에서는 환자를 살필 때 숨을 참거나 환자의 의복을 끓는 물에 삶아 소독하고, 치료 후에는 참기름을 코끝에 묻혀 재채기하도록 하는 등의 감염 예방 수칙들을 찾을 수 있다.

『신찬벽온방』(사진 제공: 규장각)
『신찬벽온방』(사진 제공: 규장각)

또한 조선에는 전염병 전문 기구인 ‘동서활인서’(활인서)가 존재했다. 활인서는 고려의 중앙 의료기구인 동서대비원을 계승한 치료 및 구휼 담당 기구로 특히 온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당시 활인서의 상비 처방 목록에 온역의 주 치료제였던 승마갈근탕, 대시호탕 등이 등재돼 있었던 것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활인서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명목상 유지됐을 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활인서가 상설 기구가 아니었다는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김성수 교수(인문학연구원)는 “조선에 풍수해가 많았지만 일상적인 일은 아니었다”라며 “활인서가 항상 필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는 결국 임시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조선은 재정적인 이유에 의해서도 활인서를 상설 기구로 만들지 않았다. 김 교수는 “조선 전기에는 한양에 거주하는 무당과 박수에게 세를 거둬 활인서의 운영비로 충당했는데 후기에는 이런 제도가 사라지면서 재정 문제가 더욱 심화됐다”라고 언급했다.

이렇듯 재정적으로 부족했던 활인서는 전염병이 발생하면 임시로 천막을 설치해 환자들을 치료하고 구휼할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완치자보다 사망자가 많은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김 교수는 “조선 후기 활인서는 살인서라고 불렸고 사람들은 활인서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도망 다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활인서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신동원 교수(전북대 과학학과)는 “활인서는 정식 의원이 10명, 임시직이 2명뿐이었던 규모에 맞게 운영된 것”이라며 활인서를 결과만으로 평가할 수 없음을 밝혔다. 앞서 활인서의 실패를 언급했던 김 교수 또한 그것이 조선만의 한계가 아니었음을 언급했다. 그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전염병을 치료하는 것은 어려웠다”라며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상황에서 과거에는 전염병이 유행하면 피하거나 격리하는 방법만이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단순히 환자를 격리하는 것을 넘어서 의서를 편찬하고 활인서를 설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던 조선의 국가적 전염병 대처에 대해 현대의 시점으로 잘잘못을 평가할 순 없다고 덧붙였다.

활인서 터 비석 사진(상단), 온역 치료제에 사용됐던 갈근과 시호(하단)
활인서 터 비석 사진(상단), 온역 치료제에 사용됐던 갈근과 시호(하단)

 

조선의 지방관들은 휘하의 백성들을 위해 전염병을 퇴치하려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설치했던 ‘구질막’이 있다. 나병은 나균에 의해서 생기는 만성 질환으로, 말초신경을 파괴해 감각을 잃게 하고 조직을 변형해 결과적으로 환자들의 사지를 변형하고 파괴한다. 세종 10년(1428) 『조선왕조실록』(실록)에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나병에 걸린 딸을 물에 빠트려 죽인 기록이 등장했다.

실록에 의하면, 제주도민들은 나병 환자를 바닷가 근처로 격리했다. 세종 27년(1445) 제주안무사 기건은 강제 격리된 나병 환자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바위 벼랑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는다는 것을 듣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다. 그는 곧 제주도의 세 고을에 나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료시설인 구질막을 설치했다. 구질막에서는 바닷물을 데워 3~4회 목욕하는 요법을 사용해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는 중국의 의서인 『천금방』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천금방』에는 소금을 탄 물을 데워 환자를 씻기는 것이 피부병을 낫게 한다고 적혀있는데 이에 대해 김정후 한의사는 “소금이 살균작용을 하고 따뜻한 물이 땀 배출을 도와 독소를 배출했기 때문에 피부병 치료에 효과적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의서에서는 소금물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치료에 이용했지만 기건은 바닷가와 인접한 제주도의 환경적 특성을 활용해 바닷물을 목욕요법에 사용했다. 세종 27년 실록에는 구질막을 통해 나병 환자의 69명 중 45명을 낫게 했다고 적혀있다. 

구질막의 활약에는 조선의 지방 의료시설인 ‘의국’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방 의료는 지방에서 역병이 발생하면 지방관의 지휘하에 의국의 ‘의생’들이 해당 지역에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김호 교수(경인교대 사회교육학과)는 이런 조선의 지방 의료 시스템은 “의국의 의생들이 해당 지역의 지배층인 사족(士族)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지역의 특성을 활용한 역병의 대처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구질막도 제주도 의생의 도움을 받았다. 세종 27년(1445) 기록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치료소를 설치해 지방 의생들로 하여금 환자들을 관리하고 치료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김호 교수는 조선의 의국을 “공공의료의 확산을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인 동시에, “공공성의 확보 차원에서 지방의 사족들이 호응해 운영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나병은 조선에서 치료가 어렵다고 여겨져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기피했다. 김성수 교수는 “『향약집성방』(1433)에서 나병을 풍라(風癩)도 아니고 대(大)풍라라고 한 것에는 그 병의 혹독함을 두려워했던 조선 사람들의 태도가 드러난다”라며 당시에는 그만큼 나병의 치료가 어렵다고 인식됐음을 설명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구질막을 설치하고 환자들의 구제를 시도했던 기건의 노력에 큰 의의가 있음을 드러낸다. 김성수 교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치료 자체의 과학적 원리를 평가하는 것보다도 그 태도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구질막에서 활용하던 우물인 ‘용다리새미’
구질막에서 활용하던 우물인 ‘용다리새미’

 

조선의 민중들은 때론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두창(천연두)’과 ‘마진(홍역)’을 아울러 일컫는 ‘두진’은 특히 민간을 중심으로 치료와 대처가 이뤄졌다.

먼저 두창은 급성 발진성 질환으로 고열, 허약감, 오한, 두통, 허리 통증, 복통, 피부발진의 증상을 일으킨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두창은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유입됐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명확한 치료법이 없어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에 떨게 했던 질병이었다. 

두창의 대처가 민간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에는 두창의 발병 원인에 관한 학설이 영향을 미쳤다. 보통 백성들은 두창이 귀신에 의해 발병한다는 ‘귀신설’을 믿었다. 김성수 교수는 “옛날에는 한 번 걸리면 다시 걸리지 않는 ‘면역’의 개념이 신기한 것이었다”라며 “그래서 두창을 귀신의 소행이라 여겼던 것”이라고 말했다. 귀신설을 믿었던 조선 사람들은 두창을 퍼트리는 귀신을 달래고 배웅하기 위해 굿을 벌였다. 신동원 교수는 “굿은 두창이라는 카오스 상태를 맞이한 환자에게 병을 설명하고 고칠 수 있다는 종교적 위안을 주는 방안이었다”라고 굿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믿음을 설명했다. 

조선에서 통용되는 두창의 치료법이 없었던 것도 두창의 대처가 민간에서 진행된 이유 중 하나다. 당시 두창 치료법에 대한 연구는 두창과 비슷한 발진이 나타나는 마진 연구와 함께 이뤄졌다. 두 전염병의 유일한 치료법은 중국에서 연구되던 ‘종두법’이었는데 종두법은 예방 접종의 시초로 인체에 두창 바이러스를 심는 방식의 치료법을 뜻한다. 하지만 예방 접종의 개념이 자리 잡기 이전이었기에 종두법은 조선에서 정식 치료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학자들은 종두법 연구를 꾸준히 이어갔다. 대표적인 이가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두진의 발병을 한 해의 운세로 따지는 ‘운기론’과 두진 치료를 위해 개똥과 날가재를 섭취하는 풍속의 오류를 그의 저서 『마과회통』(1798)에서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두진을 의학적으로 설명하고 치료하기 위해 복중에서 태아가 섭취하는 어머니의 독인 태독을 두진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정약용은 태독을 인위적으로 신체에 넣는다면 태독을 순하게 신체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중국의 종두법을 처음으로 조선에 들여왔다. 정약용이 제시한 초기 종두법인 ‘인두법’은 환자의 환부에서 최상급의 상처 딱지를 가려내 빻은 다음 코로 흡입하거나 환자의 의복을 입는 식으로 진행됐다.

예방 접종의 효과는 있었으나 위험도가 높은 치료법으로 실험적인 성격을 띠었기에, 정약용의 연구는 국가의 공식적인 치료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샤머니즘적 치료법 대신 의학의 영역에서 두진의 치료법을 지속적으로 연구했고 이는 후대의 연구에 도움을 주며 많은 백성의 목숨을 살렸다. 신동원 교수는 “획기적 예방법을 국내에 알리고 정착시켜 두진의 발병률을 현저히 낮추는 데 기여한 이종인이 정약용에게서 인두법을 배워 실천했다”라고 언급하며 정약용의 연구의 의의를 강조했다.

정약용의 인두법과 오늘날의 예방 접종
정약용의 인두법과 오늘날의 예방 접종

 

조선은 전염병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국가는 전염병 전문 기구를 둬 효과적으로 전염병을 퇴치하고자 했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전국으로 보내 더 많은 백성을 치료했다. 지방에서는 의국 의생들이 각 지역의 특성을 활용해 환자를 치료했고 지방관은 애민 정신을 토대로 지방민들과의 협응을 통해 치료소를 설치해 운영했다. 백성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굿 등의 토속적 믿음으로 전염병을 이겨내려 했고 학자들은 새로운 치료법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전염병의 두려움을 이겨냈던 선조들의 정신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유지원 기자 uz1091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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