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동 교수(화학부)
정택동 교수(화학부)

국카스텐의 노래 '비트리올'을 듣는다.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작곡했다는 노래다. 주인공은 젊고 아름다우며 좋은 직장을 다니고 시간 여유마저 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의욕이 바닥이다. 그의 주치의는 비트리올 탓이라고 한다. 코로나 블루가 기승이다. 모쪼록 다들 안녕하시길. 

코엘료의 소설에서 뻔한 일상에 대한 회의(懷疑)를 상징하는 독소로 차용했던 비트리올(vitriol)은 원래 연금술의 언어였다. 어느 소설에서는 '땅 속으로 들어가서 잘못을 바로잡으면 숨겨진 돌을 찾게 되리라'(Visita Interiora Terrae Rectificando que Invenies Occultum Lapidem)의 주술적 약어로 등장하기도 한다. 연금술의 시대에 물질에 대한 지식은 신비주의와 버무려져 있었다.

과거 연금술사가 비트리올의 기름(oil of vitriol)이라 불렀던 액체를 오늘날 우리는 황산(sulfuric acid)이라 부른다. 비료 생산, 광물 처리, 폐수 처리, 표백, 석유 정제 등 너무나 다양한 분야에 쓰이다 보니 물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물질이다. 우울증이나 삶의 의욕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황산과 신비주의, 심지어 락밴드까지, 현대 화학을 배우는 이들에게는 고개를 갸우뚱할 연관이다. 

물질의 변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현대 화학으로 진화해 오면서 신비주의의 물이 많이 빠졌다. 이제는 철학적 측면보다 먹고사는 현실에 더 가까워졌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 127조 제1항이다. 이를 근거로 과학기술을 경제의 하위 개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하긴, 코로나 백신에 대한 희망도, 이 나라 세금을 도맡아 내는 기술도 물질의 변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태어난다. 그럼에도 마음이 썩 편치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변환하는 물질세계에 관한 탐구는 국가 경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 학문이라면 물질세계는 빼놓을 수 없는 학문의 대상이다. 응용과학 전반은 물론 인지과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학문과 기술은 물질 변환에 관한 지식의 토대 위에 서 있다. 기억하라. 인조(人造)는 피조(被造)의 변주다.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인류는 신비주의의 안대를 벗었다.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삼라만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화학은 케미스트리(chemistry)다. 고백하건대, 겸허한 마음으로 실험하고 또 실험해 자연의 전모에 대해 한발 한발 다가갈 수밖에 없는 운명은 연금술사나 오늘날의 화학자나 매일반인 듯하다. 실제로 해보는 것. 재현성을 확인하는 것. 기존의 지식과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는 것. 이것이 실험과학자의 운명이다. 그러다 보면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도 한다. 

얼마 전 어느 국립대학 실험실에서 안타까운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그 사고의 배경과 내용, 사후 처리 과정을 보면서 걱정을 금할 수 없었다. 일터에서의 안전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는 작금의 흐름에 걸맞게 대학 실험실은 충분한 안전망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언제 발생할지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가장 일반적인 장치가 보험이다. 우리 대학이 가입한 보험의 내역을 보면 요양, 장해, 입원에 따른 급여에다 심지어 유족과 장의 비용까지 모든 항목의 최대 보장 한도를 합해도 5억 원을 넘을 수 없다고 한다. 사고가 일어났던 대학과 다르지 않다. 막상 사고가 났을 때 연구자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확실하지 않다. 본연의 학문 활동 와중에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피해자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게 과연 기우일까?

더 좋은 대학이 되려면 도전에 나서는 연구자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안전은 기본이다. 지금보다 전공별로 더 세분되고 더 보장성이 크며 명료히 제도화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예산이다 책임 소재다 갑론을박 걸림돌이야 많겠지만 분명 지금보다 무언가 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태어난 세계에 대한 무지는 잘못된 세계관의 진원지다. 위험을 무릅쓴 과학은 이미 인류에게 새로운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삶에 대한 비관을 유발한다는 누명을 쓴 비트리올이 언젠가 삶의 희망을 상징하는 낱말이 돼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실험실 탐험가의 몫일 것이다. 그들은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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