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형 학예연구사(중앙도서관)
송지형 학예연구사(중앙도서관)

중앙도서관에는 고문헌자료실이 있다. 대학도서관마다 하나씩은 있을법한 고서실을 연상하기 쉬우나, 고문헌자료실에는 한자로 글을 써서, 목판이나 활자로 한지에 인쇄하고, 이를 글자가 밖으로 나오도록 반으로 접어 끈으로 장정을 하고, 표지에는 능화판으로 무늬를 낸 고서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1992년 규장각이 별도 건물을 짓고 중앙도서관에서 분리되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한 규장각 도서는 당연히 규장각으로 관리가 전환됐고,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고도서와 고문서 7만 6천여 점도 함께 규장각으로 대출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고서는 많지 않으나, 고문헌자료실에 보관 중인 책 수는 40만여 권에 달한다. 이 책들의 상당수는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에서 수집했으며, 책에는 오늘날 도서관 책에 찍혀있는 ‘서울大學校圖書’라는 장서인이 아닌 ‘京城帝國大學圖書章’이라는 장서인이 찍혀있다. 분류체계도 다르다. 중앙도서관은 초창기부터 ‘듀이십진분류법’으로 도서를 분류했으나,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화한서분류표’와 ‘유럽서분류표’를 작성하여 도서를 분류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대학으로 개칭했고,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해체됐다. 다만, 경성대학의 캠퍼스와 도서를 비롯한 기자재는 서울대학교로 이관됐다.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뒀고, 나중에 이공학부를 설치했으며, 예과를 운영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주로 법문학부 도서를 관리했으며, 의학부와 이공학부, 예과도 모두 별도의 도서실을 운영했는데, 이는 서로 캠퍼스가 달랐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도서는 현재 연건 캠퍼스의 의학도서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공학부와 예과 도서는 공학도서관과 문리도서관에서 각각 관리하다 1975년 서울대 종합화와 관악캠퍼스 이전과 함께 중앙도서관으로 이전됐으며,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의 도서를 이어받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을 설치했으므로, 이 도서는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 편이나,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부가 소실되거나 유출됐다. 올해 영국의 소설가 앨런 가너로부터 경성제국대학 장서인이 찍힌 책을 한 권 돌려받았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겨울 서울대에 고립돼 있던 부대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도서관의 집기와 책을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그중 한 영국군이 만일 살아남는다면 당시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기 위해 책 한 권을 들고 나왔다. 다행히 이 군인은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나중에는 당시의 끔찍한 기억을 잊고 싶어 장교로 복무하던 가너에게 자신이 들고 나온 책의 처분을 의뢰했다.

이 책은 바로 1548년 취리히에서 출판된 테오도르 비블리안데르의 『모든 문자와 언어의 공통 본성론』이다. 올 초 가너가 본교 언어학과의 김주원 교수에게 책의 반환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했고, 4월에는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관정관 2층 관정마루에서 11월 20일까지 개최 중인 <한국 현대사의 주요 순간: 서울대인과 서울대 도서관의 경험>에 이 책을 전시하고 있으니, 한국전쟁을 거쳐 70년 만에 서울대가 돌려받은 책을 한 번쯤은 둘러보길 바란다.

1946년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 인근의 10개 전문학교와 교육기관을 폐지하고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됐고, 오늘날 서울대학교의 전사(前史)에 대한 기록은 캠퍼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도서 정도만이 남아있다. 의학도서관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도서 외에도 대한의원과 조선총독부의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도서가 남아있고, 농학도서관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의 도서가 남아있으며, 법학도서관에는 법관양성소, 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의 도서가 남아있다.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의 도서는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에 일부가 남아있다.

중앙도서관은 한국전쟁 중에도 피난지 부산에 임시도서관을 개설하는 등 도서 수집을 계속했으나, 서울대학교 설립 이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인 1974년까지 중앙도서관의 도서 증가량은 13만 권이 안 됐다. 이마저도 대부분은 신간 도서 구입이 아닌 중고 도서의 수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제법 오랫동안 서울대 교육은 사라진 학교에서 남겨준 유산에 기댄 셈이다. 이제 이 책들은 대부분 더 이상 열람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돼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혹시라도 이 책들을 접하게 된다면 케케묵은 먼지라도 한번 털어주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쓰다듬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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